brunch

매거진 Joo절Joo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O Dec 27. 2022

크리스마스 전통

우리 가족은, 아니 더 정확히 나의 남편은 크리스마스마다 케이크를 만든다.


남편이 베이킹을 시작한 건 신혼 때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를 보고 나서였다. 저녁에 퇴근하고 반죽을 치대어 단팥빵, 프레첼, 식빵 등 다양한 빵을 만들었다. 반죽 치대는 쿵쿵대는 소리에 경비실 민원을 받은 후 반죽기를 사서 시간이 좀 단축되었지만, 어쨌든 저녁부터 시작한 빵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완성되었다.

처음에는 빵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밤 늦게 빵을 먹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나중엔 됐다며 사양했다.   


한동안 빵을 굽던 남편은 바빠지고 관심이 시들해져서 빵을 굽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어 보겠다고 선언했다. 오븐 대신 밥솥을 이용하여 케이크 시트를 만드는 방송을 봤던 차라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애들이랑 같이 만들면 얼마나 좋겠어?"

남편은 아이들과 추억을 만들 것으로 기대했지만, 막상 케이크를 만들며 들려오는 소리는 케이크를 망칠까 봐 노심초사하며 "만지지 마! 가만히 있어!"라는 남편의 말소리다.   


어찌 됐든 크리스마스마다 케이크를 만드는 것은 우리 가족 크리스마스 전통이 되었다. 케이크와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실 매년 케이크를 만들 때마다 남편이 힘들어 보이지만 나는 이때다 싶어 애들을 남편한테 맡겨놓고 잠시 자유 시간을 보낸다.




올해는 남편이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가나슈 초콜릿과 기타 등등 재료를 미리 주문해 뒀다. 생크림만 크리스마스 임박하여 사면 되었는데, 크리스마스 며칠 전부터 생크림을 찾을 수 없었다. 주로 가는 하나로 마트에도, 온라인 이마트몰에도 없었다. 하나로마트에 그나마 휘핑크림이라도 있어서 살까 남편에게 물었더니 휘핑크림으로 만들면 달고 맛이 없다고 하여 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에 B마트(배달의 민족에서 운영하는 배달 전용 마트)에 생크림 4개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급히 장바구니에 넣었으나, 아직 B마트 영업시간이 아니라고 떴다. 남편 깨면 바로 주문하려 했다가 까먹은 사이 생크림이 동나 버렸다. 재작년에 이마트, 하나로마트 등에 없는 생크림이 홈플러스에 잔뜩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 남편은 홈플러스에 갔다. 그곳에도 생크림이 없었다! GS 마트에도 가보고 하나로마트에도 다시 가봐도 없다. SSG에도 없다. 그야말로 생크림 전쟁이다.


남편은 인터넷에서 생크림 만드는 법을 찾아서 직접 생크림을 만들기로 했다. 우유, 버터, 계란 노른자 등 재료를 샤샤샥 섞고 냉장고에 넣어뒀다. 12시간 이상 숙성해야 생크림이 된다고 한다. 부디 생크림이 잘 만들어져 크리스마스 당일엔 케이크를 만들 수 있길 바라며...


크리스마스 당일, 남편은 초코가루를 섞어 케이크 시트를 만들고 딸기도 시럽에 졸였다. 이제 대망의 생크림 차례. 생크림에 설탕을 섞고 거품기로 돌리면 액체 상태였던 생크림이 고체처럼 뭉쳐진다. 나는 애들과 남편을 주방에 남겨두고 방에 들어가 '재벌집 막내아들'을 봤다. 그런데 밖에서 나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아이들이 방으로 와서 생크림이 안 되고 있단 소식을 전한다.

"안 돼. 실패했어. 이건 못 만들어."   

남편의 낙담한 소리에 나와 보니 남편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니 왜? 거품기로 좀만 더 섞어 봐."

"한참 했어. 30분 넘게 했다고. 하나도 안 뭉쳐져. 망했어!"

남편은 생크림이 담긴 보울을 싱크대에 버렸다.

"왜 버려? 그거 못 쓰나?"

"이걸 얻다 써? 아아, 버터를 2/3나 쓰고 우유에 계란에... 재료만 버렸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낙심했다.

"크리스마스에 케이크가 없다니. 최악의 크리스마스예요."


나는 급히 하나로마트와 트레이더스 등에 전화하여 생크림이 있는지 물었지만 모두 없단다. 멘붕인 남편이 케이크 시트까지 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버리지 마. 내일 생크림 사서 만들면 되지. 오늘은 일요일이라 새 물건이 안 들어와서 없는 거지, 내일은 크리스마스도 지난 다음이니까 생크림 있을 거야."

"그래. 아우, 휘핑크림이라도 있을 때 살 걸."

"이마트몰에 생크림 이제 담을 수 있다! 원래 물건 없어서 장바구니에도 안 담겼는데 지금 보니까 4개 남았다고 나오네. 결제했으니까 내일 올 거야. 내일 만들어."

"그래..."

남편은 타격을 입은 정신을 달래고자 기타를 치다가 낮잠을 잤다. 나는 그동안 식탁과 주방을 치웠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월요일 생크림이 도착했다. 그토록 찾아 헤맨 생크림, 드디어 만났구나!

크리스마스 레어템 생크림


남편과 아이들은 생크림에 설탕을 넣고 반죽기로 돌렸다. 나는 또다시 방에 들어가 아이들의 "맛있겠다. 생크림 먹어도 돼요?" 하는 소리를 들으며 드라마를 보다가 "애들 사진이라도 찍어 주지?"라는 남편의 타박에 황급히 나와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하루 늦은 케이크지만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케이크였다. 맛도 물론 최고였다.

2022년 케이크


남편은 나에게 어제 자신이 멘붕일 때 내가 안정적이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평소에는 나보다 남편의 정서가 더 안정적인 편인데, 나도 남편보다 안정적일 때가 있다니, 그래서 남편을 위안해줄 수 있다니 다행이다. 내년에는 생크림을 꼭 미리 사자고 다짐했다.



https://v.daum.net/v/20221225175502530?x_trkm=t


매거진의 이전글 졸리거나 자거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