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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n 16. 2023

포케가 생각나는 밤

옛 팀장님을 아주 오랜만에 떠올린 건 포케(Poke)를 파는 가게의 간판 덕분이었다. #포케는 하와이어로 '자르다', '십자형으로 조각내다'라는 뜻으로 익히지 않은 해산물과 채소를 소스에 비빈 하와이의 전통 음식이다.


팀장님은 희망퇴직을 하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가셨다. 미국 가면 뭐 하실 거냐고 팀장님한테 물으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트레일러 기사가 되어 미국 전역을 누비고 다닐 거라고 했다.

"에이, 위험해서 사모님이 허락하시겠어요?"라는 말에 팀장님은 "설득해야지."라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대답을 하며 또 싱글벙글 웃었다.


회사 관두겠다고 말씀은 저리 하셔도 정년까지는 계시겠지, 싶었는데 코로나 기간에 뜬 희망퇴직 공고를 보고 지금이 적기다 싶으셨는지 훌쩍 사표를 내셨다. 팀장님은 미국에 가서 포케 가게를 열 거라고 하셨다. 트레일러 기사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팀장님은 성품이 훌륭하고 따뜻한 분이라 회사 내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만나본 사람 중에 인품이 가장 훌륭한 분이었다.) 팀장님의 퇴직 소식에 당연히 팀원들도 충격을 받고 아쉬워했다. 야근을 하는 팀원이 있으면, 그는 조용히 팀원 곁을 서성이다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얼른 들어가고 내일 하라고 나지막이 얘기해주셨다. 얼토당토않는 황당한 지시를 임원한테 받고 내가 씩씩대고 앉아 있으면, 몸을 숙이고 바람이 지나갈 때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해주었다. 팀장님의 무수히 많은 배려를 받고서도 그릇이 덜 된 나는 '오늘 일 안 하고 들어가면 그 일은 누가 해? 내일의 내가 할 거 아니야!'라고 속으로 발끈하거나 '몸을 숙인다고 상사의 지시가 없어지나?'라며 투덜댔다. 그러나 황당한 지시사항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야무야 사라지는 경우가 정말로 있었기 때문에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는 팀장님의 처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임원들의 성화와 닦달을 들으면서도 팀장님은 어떻게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괴롭고 힘든 순간에도 사람 좋은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게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오늘 아이가 영어 숙제를 노트북으로 하다가 대부분 자기가 모르는 단어라고 한숨을 쉬며 키보드를 마구 두드려댔다.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공부하면 되지, 그렇게 행동하면 되냐고 나 또한 소리를 지르며 아이한테 화를 냈다. 내가 아이보다 30년이나 더 살았는데, 감정을 다루는  아이보다 미숙했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영어 단어 퀴즈를 풀기 전에 단어장을 먼저 살펴본 후에 퀴즈를 풀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포케 간판을 보고 옛 팀장님이 떠올랐던지라 온화함과 평정심이란 무엇일까 생각한 하루였는데, 아이에게 화를 내며 하루를 마무리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다.


팀장님네 포케 장사는 잘 되시려나? 팀장님의 안부가 궁금한 밤이다.    

 


# 포케 설명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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