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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n 24. 2023

황당하지만 혼자가 아니야

이유리,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참신하고 신선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이렇게 매끄럽게 풀었는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저자는 현실 속에 환상을 툭툭 던져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슥삭슥삭 잘 버무려낸다.



<빨간 열매>는 아버지와 둘이 살던 주인공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화장하고 나면 자신의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주인공은 장례를 치르고 몇 달이나 지나서 그 말을 기억한다. 아버지의 유골과 흙을 섞어 화분에 넣고 작은 나무를 심으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물을 달라거나 텔레비전 앞으로 데려가달라거나, 인간이었던 시절 이야기를 한다거나. 주인공은 처음엔 놀랐지만, 이러면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뭐가 다른가 투덜대며 아버지 화분의 수발을 들뿐이다. 재미있는 건 어느 날 화분을 들고 산책을 갔다가 화분을 들고 나온 P라는 남자를 만난 것이다. P의 화분은 P의 돌아가신 어머니다. 아버지 화분은 어머니 화분과 친해지고 '나'는 P와 친해진다. 말하는 화분이라니 너무 기이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닌 것처럼 그려냈다.



자고 일어나니 원준의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해버린 사건을 그린 <브로콜리 펀치>도 마찬가지다. 손이 브로콜리로 변하다니 너무나 당황스러운 사건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조금 놀라운 일일 뿐 심각하지는 않다. 복싱 선수 원준의 여자친구인 '나'는 브로콜리로 변한 원준의 주먹이 멋지다고 일단 칭찬을 하고 원준에게 병원에 가자고 한다. 노인들은 원준이가 많이 허약해졌나 보다, 할 뿐이다. 예전에는 손가락이 강낭콩이 되고 버얼건 고추가 되는 몹쓸 병이 있었지만 지금은 접종도 하고 많이 없어졌는데, 하면서. 그러니까 이 황당무계한 사건은 당황스럽고 걱정되긴 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평평한 세계>에서 그린 '나'와 새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갑자기 반투명한 젤리 덩어리 같은 투명 인간으로 변해버린 '나'와 며칠 후에 역시 나와 같은 처지로 변해버린 새어머니. 내가 혼자 투명 인간이 되었을 땐 이제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면, 이젠 함께이기 때문에 덜 막막할 것이다. 비록 둘의 관계는 그동안 좋지 않았지만.



나는 한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을 읽으면 대개 어떤 소설은 맘에 들고 어떤 소설은 맘에 들지 않는다. 또한 어떤 소설은 내게 주는 임팩트가 약해서 책 전체를 다 읽고서 제목을 보면 '그 소설이 어떤 내용이더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브로콜리 펀치>>에 실린 8편은 정말로 버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둥둥>, <손톱 그림자>, <왜가리 클럽>, <치즈 달과 비스코티>, <이구아나와 나>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미있고 좋다. 황당한 사건으로 시작했지만, 뭔가 든든하고 힘이 되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결말이라 좋았던 것 같다.


황당하지만 혼자가 아니야.

그렇게 나지막이 얘기해주는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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