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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l 18. 2023

맞춤법 단상

김혼비 산문집 <다정소감>을 읽고

김혼비의 산문집 <다정소감>을 읽었다. 역시 김혼비! 따뜻하고 배려와 공감이 넘치는 글이 한가득이었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다"라고 밝혔는데 성공한 것 같다. 김밥에 참기름을 바르는 용도인 김솔, 그 김솔을 보관하는 김솔통. 비록 존재나 명칭은 낯설어 "범국민적인 도구적 유용성 따위는 획득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p.19)"인 것처럼 나에게는 이 산문집이 딱 그런 존재였다. 무척 재밌으면서도 좋은 자극이 되어 반가웠다.  



이중에 나를 뜨끔 하게 만든 작품이 있다. 바로 맞춤법과 관련한 '그의 SNS를 보았다'이다. 저자는 11년 전에 한 뮤지션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뮤지션이 SNS를 시작하게 된다. 문제는 그의 맞춤법이 엉망이었다는 것. 그는 '빨리 나으세요'의 상황에 '빨리 낳으세요'라고 쓰거나 '무릅'쓰는 대신 '무릎'썼다. 때로는 된소리를 싫어하는 듯 쌍시옷 받침 대신 시옷 받침만 쓰고, 때로는 된소리를 좋아하는 듯 '~할 꺼야', '~할께'라고 쓰는 것도 다반사였다. (이 실수들을 접하고 저자가 느낀 심란함이 내가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과 정확히 일치하여 나는 육성으로 웃으며 읽었다) 저자는 참고 참다가 석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SNS에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나서 맞춤법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된다.

"가정 형편도 어려운 와중에 알바하는 틈틈이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 하느라 다른 걸 돌아볼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깟 맞춤법 좀 엉망이면 어떻다고. 그걸 뭐라고 하는 사람은 참.....(p.101)"


저자는 그 일을 계기로 맞춤법을 '기본 소양'이라고 여겨왔던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기본'으로서 누군가를 판단할 때 각자가 처한 조건이 달랐음을 고려해야 하고 (예를 들어 정규교육 여건 등) 또한 같은 조건이라 해도 사람마다 적성과 성향, 강점과 약점이 다른 점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 역시 공고하게 믿어 왔던 것 같다. 맞춤법이 한 사람의 품격을 나타낸다고. 다른 장점을 많이 지닌 사람도 맞춤법을 지속적으로 틀리면 자꾸 거슬렸다.


내가 좋아하던 선배가 있다. 일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그야말로 똑순이 선배다. 대학도 좋은 학교를 졸업했으니 학창 시절 공부도 잘했을 것이다. (굳이 학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정규교육의 여건이나 정규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맞춤법에 대한 접근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선배와 나는 일을 협의하기 위해 사내 메신저로 종종 대화를 했다. 사실 업무 협의를 빙자한 업무 불평이었을 수도 있다. 서로가 편하다 보니 (그리고 다급하고 긴박하게 쓰다 보니) 오타가 난무한 대화창이 빈번하였다. 하지만 오타와 별개로 선배는 맞춤법에 약했다. ㅐ와 ㅔ를 헷갈리는 건 기본값이었고 '빨리 나아'를 '빨리 낳아'로 쓰거나 '희한해'를 '히얀해'로 쓰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어느 순간 선배의 맞춤법이 우리 대화를 다 뒤덮어버리는 느낌이라 나는 대화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 선배를 떠올리면 늘 마음이 무거워지는 구석이 있었다. '맞춤법만 많이 안 틀린다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혼비 작가의 말대로 개인의 교육 여건과 활자 민감도는 다르다. 나는 그 '활자 민감도'라는 부분을 간과했다. 입장 바꿔서 패션 감각이 뛰어난 누군가가 '패션은 한 사람의 품격'이라며 패션 감각이 떨어지는 나를 깔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슬플까. 또한 운동을 잘하는 누군가가 운동을 못하는 나에게 대체 왜 이런 기본적인 운동도 못하냐, 한심한 인간이다 말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애초에 운동 능력이 떨어지고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이렇게 입장 바꿔 생각하니 내가 그동안 맞춤법이라는 필터로 누군가를 바라봤던 게 참으로 오만했단 생각이 들어 뜨끔하였다. 


나는 얼마나 편협한 시각에서 세상을 봤던가. 그동안 공고히 한 겹 두 겹 덧대어 두텁게 만들었던 알 껍질에 금이 간 느낌이었다. 앞으로는 타인에 대한 포용력을 좀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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