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이 내 사전에 야구란 없었는데 남편과 결혼하고 나니 야구는 우리 생활에 굉장히 가까이(?) 있었다. 아니, 어떻게 월요일 빼고 매일 야구를 하냐고!!! 남편은 그 당시 야근이 잦았는데 야근 없이 일찍 온 날은 야구를 틀어놓기 바빴다. 야구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야구는 시끄럽고 지루했다. 몇 시간 동안 같은 화면을 보는 느낌?
남편은 롯데 자이언츠 팬이었다. 부산 사람은 아니지만, 자이언츠 소속 선수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자이언츠 팬이 되었다고. 남편이 만날 야구를 틀어놓으니 나도 할 수 없이 봤다. 남편이 조곤조곤 야구 규칙을 설명해준덕분에 야구를 이해하게 됐고, 야구 지식이 쌓여가니 야구가 재밌어졌다.
야구에 눈을 뜨니 회사에 가서 야구 얘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LG 트윈스 광팬(특: 야구 얘기 시 늘 흥분함)인 같은 팀 선배, 한화 이글스 팬(특: 또 졌다며 자포자기 상태)인 동기, 롯데 자이언츠 팬(특: 롯데는 봄에만 잘하는 '봄데'라며 과도한 환호나 분노 자제)인 또 다른 동기와 틈날 때마다 야구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남편보다 내가 야구를 더 좋아하게 됐는데, 내가 야구에 얼마나 빠졌는지 자다가도 잠꼬대를 했다고 한다.
- 삼구삼진!
믿을 수 없지만 목격자가 있으므로 부정할 수도 없다.
야구장 직관도 몇 번 갔다. 롯데의 홈구장인 부산 사직구장은 멀어서 목동구장(그 당시 넥센 히어로즈 홈)이나 잠실구장(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홈)으로 갔다. 치맥을 먹고 주황 봉다리를 머리에 쓰고 부산 갈매기를 부르며 신났었는데...
임신과 출산, 육아 등으로 야구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사실 내가 야구를 좋아한 기간은 2년 남짓으로,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야구와 멀어졌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11년 만에 야구장에 오니 가슴이 왠지 벅차오른다.10년 넘게 육아로 단절되었던 문화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단 게, 그리고 그 계기가 바로 아이라는 게 신기하다.
오늘(8월 18일) 경기는 1위 LG 트윈스와 2위 SSG 랜더스의 경기다. LG가 1위라니 놀랍다. 내가 야구 보던 12년 전과 13년 전, 구단이 8개였던 시절에 탄탄한 상위권은 SK와 삼성이었다. 엘롯기(LG, 롯데, 기아)는 사이좋게 중하위권에 포진되어 있었다. 올해 LG가 1위라는 소식을 동생(구 LG 팬, 현 워킹맘이자 야구 단절 중)에게 전하니 동생도 웬일이라며 놀라워한다.
오늘은 어느 팀이 이기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아이가 응원하는 SSG는 작년 우승 팀이며, 예전 SK 와이번스 시절부터 강팀이었다. '이게 바로 상위권의 맛인가!'라며 여유롭게 관전한다. 그러나 기왕지사 응원하는 팀이 이겨야 즐거운 법. SSG의 승리를 기원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만다.
아이와 처음으로 야구를 직관한 이후 SSG는 연패를 이어가며 순위도 빠르게 떨어졌다. 우리가 응원한 시점부터 자꾸 지나 싶어 야구 중계를 멀리 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규 리그 순위 5위까지만 포스트 시즌(일명 가을 야구)에 나갈 수 있는데 SSG가 5위와 6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가을 야구를 못 나가는 건가 자포자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경기, 두 경기를 이기기 시작하더니 연승 행진을 했다. 이때부터였나 보다. 내가 SSG 랜더스에 흠뻑 빠지게 된 것은. 처음부터 쭉 잘하거나 처음부터 쭉 못했으면 이토록 극적인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성적이 아래로 떨어지다 상승세를 보이니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짜릿했다.
그리고 10월 3일 두 번째 직관 날. 이번엔 야구를 싫어하는 둘째까지 데리고 갔다. 야구 직관을 손꼽아 기다린 첫째 아이는 물론이고, 야구 규칙은 모르지만 응원가와 선수 이름은 다 외운 둘째까지 야구 관람을 많이 기대했다.
유니폼을 사려고 기념품 샵에갔으나 어린이 유니폼은 하나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남편과 아이들은 모자를, 나는 머리띠를 샀다. 중계 볼 때마다 관중들이 들고 있는 배트 모양 응원 도구가 부러웠다는 큰아이, 응원 도구 앞에서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에 응원 도구도 사줬다.
경기 전 신난 우리
경기 전 한유섬 선수와 김성현 선수
오늘은 NC 다이노스와 경기하는 날이다. 날이 흐려 혹시나 우천 취소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흐렸던 날씨는 점점 개어서 야구 관람하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었다. NC 손아섭 선수를 보니 옛날 롯데 자이언츠 시절이 생각나 반가웠다. 처음엔 5대 0으로 져서 이대로 지나 했는데, 5회와 6회에 대량 득점을 하며 이기게 되었다.
우리 둘째는 딱 2회까지 응원하며 열심히 보다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이거 언제 끝나?"라며 지루해했다. 랜더스필드에는 이런 어린이를 위한놀이터가 있다. 놀 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잠시 시간을 때우기엔 충분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느라 득점의 짜릿한 순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엄마 야구 좀 앉아서 보면 안 되겠니?
9회에 위기가 있긴 했지만 결국 이겼다!
이후 경기에서도 성적이 좋아 SSG는 현재(10월 10일) 3위가 되었다.
야구에 빠지는 건 인생의 낭비라고 어떤 이가 말했다. 그럴 시간에 책을 읽고 자기 계발을 하라고. 내가 야구를 안 보던 시절에 들었던 말이라 꽤 공감했다. 야구에 서너 시간씩을 할애하는 것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야구에 다시 빠지고 말았다. 큰아이가 없어도 야구 방송을 틀고, 아이들이 숙제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야구 중계 화면을 확인한다. SSG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선수들의 출근길과 더그아웃 영상까지 섭렵하였다.
수시로 SSG 응원가를 부르고 작년 SSG 우승 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보며, 주말이면 아빠와 야구 캐치볼을 하는 큰아이가 더 야구에 빠진 것인가, 나보다 한참 어린 선수들의 인터뷰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내가 더 야구에 빠진 것인가.
야구에 빠지는 것은 인생의 낭비라지만 사람이 어디 알차게만 살 수 있으랴. 야구 덕에 일상에 재밌는 일이 하나 추가된 거라 생각하고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