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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Oct 11. 2023

인생이 행복해요

야구 입문기

아들의 관심사가 바뀌었다. 유치원 때부터 올 초까지 6년 동안 아들의 관심사 1순위는 한결같이 지하철이었다. 아이는 지하철 노선을 줄줄 외웠고, 지하철 안내 방송을 핸드폰 알림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코레일 사가(社歌)를 신나게 불렀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서울교통공사 마크를 올려놨다. 이런 아이를 위해 주말이면 지하철 모험을 떠났었다.


변치 않을 것 같던 지하철 사랑이 시들해진 건 올해부터 아이에게 새로운 다른 관심사들이 생기면서다. 자동차, 큐브, 야구. 그중 1위는 야구다. 5학년 1학기 때 학교에서 체육 시간 발야구를 한 게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발야구를 통해 야구의 규칙을 조금씩 알게 된 아이는 TV로 야구 중계를 두어 번 보면서 "나 어느 팀 응원하지?"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야구팀에 정착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바로 '주니어 생글생글' 기자단 야구장 취재였다. 주니어 생글생글은 한국경제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신문인데 정기구독을 하면 기자단 활동을 할 수 있다. 주니어 생글생글에서 주제를 공지하면 그 주제에 맞춰 글을 써서 낼 수도 있고, 취재 장소를 공지하면 취재를 다녀와서 원고를 쓸 수도 있다. (경쟁이 치열함)  

2023년 5월에 실린 아이의 기사


그동안 공지된 취재 장소는 스타벅스, 서울시 청사, 국회의사당, LG아트센터, 한국 금융사 박물관 등 다양했으나 아이는 매번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취재 신청률이 높아 경쟁이 치열한데, 처음 신청하는 사람에게 그나마 기회를 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있어 나 역시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희망하는 장소가 나오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지하철 관련 장소나 나와야 신청하겠구나 할 무렵 야구장 취재 공지가 나왔다.


- 이번 취재 장소는 야구장이라는데... 신청할래? (당연히 안 갈 줄 알고 툭 던져봄)

- (무심하게) 네, 그러죠.

- 간다고? 그럼 신청서 써봐. 선수 인터뷰하고 야구 경기도 관람한대. 근데 경쟁이 치열해서 안 될 수도 있다?

-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근데 됐으면 좋겠다.    




운이 좋게 취재단에 뽑혀 8월 18일 야구장에 가게 되었다. 입장권을 세 장 준다기에 야구를 싫어하는 둘째는 친정에 맡기고 갔다. 아이가 선수 인터뷰를 간 동안 나와 남편은 외야석에서 기다렸다.  


주니어 생글 기자들은 박종훈 투수와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 아이는 질문을 몇 개 준비해 갔으나, 다른 기자들의 취재 열기로 질문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인터뷰 후에 그라운드에 올라가서 사진 촬영을 했는데 나와 남편은 아이들이 그라운드에 올라온 줄도 몰랐다. (마침 외야석 바로 앞에서 이마트 데이 이벤트가 있었다.)

  

기자단 단체 사진


취재를 마치고 외야석 자리로 온 아이는 말했다.

- 아까 어느 팀 팬인지 손 들 때 전 SSG 랜더스에 손 들었어요. 전 이제부터 SSG 랜더스 팬이에요.


아이가 응원하는 랜더스가 전반에 4대 0으로 이겨서 흥이 났다. 4회에 최주환 선수가 홈런을 쳤는데 분수와 조명 깜빡임 효과(?)가 나와 우리 아이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그러나 7회에 4대 4 동점이 되었고 예상보다 오래 걸리는 경기 시간에 우리는 먼저 경기장을 나와야 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경기를 봤는데 동점 상황이 지속되더니 연장전까지 가고, 친정에 들러 둘째를 데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결국 경기에서 패하긴 했지만, 이 취재와 야구 관람이 아이의 마음을 불태우긴 충분했나 보다.




아이는 본격적인 SSG 팬이 되었다. 매일 저녁 응원가를 들으며 외웠고 (덕분에 야구 싫어하는 둘째까지 응원가를 다 외움) 아침 알람도 응원가로 설정했다. TV로 야구 경기를 챙겨 보는 것도 모자라 야구 기록을 외웠다.

- 홈런 1위는 한화 노시환이고요, 2위는 SSG 최정이에요. 타율 1위는 NC 손아섭이고, ..... 다승 투수는 ... 세이브 최다 투수는 ...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 마음만 먹으면 외울 게 수두룩하다. 잡지식을 좋아하는 큰아이에게 새로운 건수가 생긴 셈이다.


우리가 경기를 직관하고 온 부터 SSG 랜더스는 연패 행진을 이어가더니 2위였던 순위가 급기야 6위까지 떨어졌다. 아이가 응원하는 팀을 같이 응원하다 보니 나는 자꾸 화딱지가 났다.

- 아니, 방금 그 실책 뭔데? 잡았어야지!

흥분하는 나에게 아이는 평온하게 말했다.

-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잖아?

- 없어! 그럴 순 없다고!!  

   

인천 구장이 집에서 머니까 LG나 두산으로 바꾸는 건 어떠냐는 나와 남편의 제안에도,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야구 소식은 다 알고 있는 둘째의 "잘하는 팀으로 바꾸는 게 어때? 1위 LG나 2위 KT로."라는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아이는 굳건하게 SSG를 응원한다.

야구 보는 첫째와 책 보는 둘째. 둘째는 안 봐도 다 안다.


어느 날 아이가 학원 끝나고 전화를 하면서 말했다.

- 엄마, 난 요새 인생이 행복해.

- 오, 어떤 면에서?

- 날씨가 이렇게 시원해져서 학원 갔다 오는 것도 좋고 (아이는 더위를 많이 탐) 큐브도 재밌고 (못 맞추던 큐브를 최근 터득함) 야구 보는 것도 좋고.

- 야구 맨날 지는데도 좋아?

- 응, 좋아! 요즘 내 관심사 1위 야구!


행복은 매우 주관적이라 각자 다르게 느낀다. 어떤 이는 행복을 예민하게 느끼고 어떤 이는 행복에 둔감하다. 우리 아이는 요즘 야구 덕분에 행복을 깊이 느끼는 중이다.


아들의 행복에 행복을 더 얹어주고자 나는 10월 초 야구표를 예매했다. 그리고 이 직관으로 야구에 깊이 빠지게 된 건 오히려 나였다.



엄마의 야구 입문기

https://brunch.co.kr/@im1cree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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