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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Oct 14. 2021

회사에서 음식 파티

큰 아이가 다섯 살, 유치원생일 때 나는 퇴근하고 아이에게 유치원에서 뭐 했는지 묻곤 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큰 아이는 조잘조잘 유치원에서 인상 깊었던 일들이나 재미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물론 이야기의 주제는 철저히 아이가 꽂힌 이야기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아이가 유치원에서 누구와 친한지, 유치원에서 전반적으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파악할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것.



주로 자기 얘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물었다. 

"엄마는 오늘 회사에서 뭐 했어?"

아, 역으로 회사에서 뭐 했냐는 질문을 받으니 정말 해 줄 말이 없었다.


엑셀로 표 만들어 숫자 계산하고, 문서 만들어 이 문구가 낫냐 저 문구가 낫냐 고민하고, 줄 맞추고 글씨체 조정하고, 전화해서 다른 부서 사람과 싸우고, 이상한 사람 욕했어...라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 하겠다. 아이한테 얘기해 줄 만한 신나고 즐거운 일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새로운 부서로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일을 수행하는 것도 버거웠다. 


아침이면 두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로 화장을 하고, 문을 나서기 전이면 늘 엄마 회사 가지 말라며 우는 둘째 아이를 달래다가 지각 일보 직전인 시간에서야 집을 나섰다가, 퇴근 시간이면 미처 일을 다 끝내지도 못 한 상태로 총총거리며 급하게 집에 와야 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집에서까지 회사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일과 생활의 분리가 필요했다. 물론 집에서도 끝내지 못 한 일 생각을 늘상 하긴 했으니, 일과의 단절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냥... 일 했지, 뭐."

결국 나는 아이에게 회사에서 뭐 했는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살 큰 아이가 역할 놀이를 하자고 했다. 그 당시 큰 아이는 역할 놀이를 아주 좋아해서 엄마아빠 놀이, 혹은 유치원 놀이 등을 하자고 제안하곤 하였다. 

그 날은 아이가 엄마 역할이고, 내가 유치원생 아들 역할이었다.

 

아이: 유치원 잘 갔다왔니?

나   : 네, 엄마. 

아이: 오늘은 유치원에서 뭐 했니?

나   : 응,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어요. 

         (대답을 내심 궁금해하며) 엄만 회사에서 뭐 했어요? 

아이: 으응, 엄만 회사에 가서 친구들하고 음식 파티를 했어! 정말 재미있었어!


내가 아이에게 회사 생활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가 상상하는 회사 생활이 궁금했는데, 해맑게 대답하는 아이 모습을 보니 참... 회사 생활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다고 말해줘야 하는 건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 말이 맞았다. 회사 생활에서의 즐거움은 동기들과의 외식, 지인들과의 티타임, 팀원들과의 간식 시간 등이었다. 그 시간은 단순히 먹는 시간이 아니라, 일하면서 힘든 점이나 사람들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음식 파티'가 내가 회사에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내일도 '음식 파티'하러 출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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