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적응, 부적응

by 레드뷔

승환은 긴 정적을 가만히 견뎠다. 두려움 속에서 그는 몇 번이고 탈출을 고민했지만, 정각마다 강당을 순찰하는 군인들의 발소리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쉽사리 꺾였다.

기이한 상황과 성 부장에 대한 죄책감, 간간이 들려오는 폭발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 탓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집요하게 승환을 괴롭혔다. 그 와중에 아내와 딸이 죽도록 걱정됐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두 번 정도 울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자신만 깨어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자 사람들이 깨어났다. 잠들어 있던 김 과장도 함께 깨어났다.


“하~~~~암. 간만에 푹 잤네. 어, 맞다, 허 대리!”

“네 과장님!”

“내도 그 꿈 꿨다... 하얀 나무 나오는 꿈.”

“네? 아...”

“근데 그 나무 진짜 엄청 크고 멋지더라. 그래 멋있는 거 처음 봤다. 참 대단해...”


‘이 상황에 그런 걸 감탄하고 있을 땐가?’ 승환은 김 과장에게서 차분함을 느꼈다. 불편한 예감이 그를 훅 덮쳤다. 그는 애써 부정하며 화제를 돌렸다.


“과장님, 벌써 이틀짼데 가족들 걱정 안 되십니까? 저는 너무 걱정돼서...”

“걱정하지 마라. 다 잘 있다.” 김 과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승환의 말을 끊었다.


승환의 예감대로 김 과장은 변해 있었다. 초월해 있었고, 더 정확히는 무신경해져 있었다. 심지어 가족의 안위도 이제 그에게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다. 승환은 한 번 더 그를 자극했다.


“과장님, 그러지 마시고 같이 나가는 것 생각해보시죠? 여기 이러고 있다가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딜 간다 하노? 이 시국에. 내는 여 있을란다. 나가봤자 금방 잡힐걸?”

“과장님, 왜 이러세요? 안 그러셨잖아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승환이 나지막이 그를 채근했다.

“뭔 정신? 내 완전 정상인데? 허 대리, 좀 진정해라. 만다꼬 열을 내고 그라노?”

“아니, 제가 열 안 내게 생겼습니까? 저 폭발음 안 들리세요? 세상이 저런데, 우리 딸이랑 마누라가 어디서 어떻게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승환은 답답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김 과장에게 버럭했다. 가장 놀란 건 승환 자신이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김 과장은 차분했다.


“허 대리, 괜찮아, 잘 될 거야. 응? 걱정 마...”

“과장님...”


승환은 힘이 쭉 빠졌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데다, 홀로 영원 같던 적막을 견디며 인간 카페인, 활기맨 그리고 이곳에서 유일한 자기 편이라 생각했던 김 과장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린 그였다. 그가 깨어나면 뭐라도 시작할 거라 기대했지만, 기대는 쉽게, 허망하게 무너졌다.


십여 분 후, 군인들이 천막을 돌며 빵과 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1인당 빵 하나, 생수 하납니다.”

“저기요,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런데 하나씩만 더 주면 안 될까요?”


계속 깨어 있던 탓에 허기가 배에 달했던 승환은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식탐을 부렸다.

“안됩니다~” 빵 상자를 든 군인이 말했다.


‘아오, 저 얄밉고 단호한 말투 보게? 내 당랑권으로 콱! 그냥!’


하지만 승환은 행여나 그 하나조차 못 받을까 조심스레 한 번 더 간청했다.


“저기 그러지 마시고... 하나만 더...”

“다른 사람들은 다 아무 말 안 하는데... 공평해야지 말입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줬잖아요! 이거 딸랑 하나 먹고 어떻게 버티라고요! 김 과장님!! 얘기 좀 해주세요! 얘네들이...”

“허 대리, 그냥 주는 대로 받아라.”

“과장님. 그래도...”

“별수 있겠나? 주는 대로 받아야지.”


승환은 한 번 더 맥이 빠졌다. 평소 왕성한 식성에 빵돌이였던 김 과장이 먹는 것에서 만큼은 동조해 줄 거라 믿었지만 그 예상도 빗나갔다. 다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승환은 여기서 자기가 유별난 건지, 아니면 어제 휴대폰 뺏기면서 개털됐던 교훈이 자기를 변화시킨 건지 혼란스러웠다.

군인들이 나가자 승환은 빵과 물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허기가 조금 채워지자 그는 문득 씻지 못한 머리에서 쉰내를 느꼈다. 이곳에 온 이후 모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있었다. 굶주림, 비위생.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었다.


‘이런데도 다들 잘 참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는 정상이 아니야.’


승환은 본능적으로 이곳에 오래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탈출 가능한 곳을 확인하기로 했다. 강당 입구에는 군인들이, 각 창문에는 방범용 창살이 보였다.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곳은 화장실 창문이었다. 승환은 화장실로 향했다. 겸사겸사 가볍게 씻고 싶기도 했다.


“어?”


화장실로 향하던 승환은 윤 차장, 이 과장 그리고 세경을 마주쳤다. 윤 차장과 이 과장의 뺨은 아직 많이 부어 있었다. 승환은 웃음이 삐져나왔지만, 시치미를 뗐다.


“윤 차장님, 이 과장님! 별일 없으십니까? 얼굴은 왜 그러십니까? 혹시 군인들이 고문했습니까?”

“아, 이거? 아냐. 그냥 이송되다 좀 부딪혔나 봐. 근데 허 대리 너도 여기 있었네? 어제는 못 봤던 것 같은데.” 윤 차장이 물었다.

“어제는 피곤해서 좀 잤습니다.”

“그래, 그저께 야근에 많이 피곤했나 보네. 잘했다.” 이 과장이 답했다.


이 과장의 뜻밖의 반응에 승환은 당황했다. 원래라면 “이 곰탱아, 이 상황에 잠이 오디?”하며 어김없이 깐족댔을 이 과장이었다.


“아참, 김 과장도 있습니다. 저랑 같은 천막에요.”

“어. 그렇구나.”


이곳에 갇힌 것도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무심히 다시 업무 얘기로 돌아갔다. 하지만 승환의 눈에 그들의 대화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내용은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어색한 발연기처럼.


“아, 허 대리님, 혹시 성 부장님 보셨어요? 어제까지 계셨는데 안 보여서요.” 세경이 물었다.


그 말에 승환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구요? 아, 성 부장님이요? 아, 아~니요. 성 부장님도 여기 계셨어요? 아이, 정말 어디 가셨담. 꼭꼭 숨으셨나? 머리카락이 보이시려나? 아, 머리카락이 없으셔서 안 보이시나?”

“대리님도 모르시나 보네요.”


누가 봐도 수상한 반응이었지만 일행은 의심 없이 그의 말을 믿었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승환은 자리를 떠나 화장실로 향했다. 방범 창살은 화장실에도 있었다. 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기대를 접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헹궜다. 수건이 없었기에 물기는 대충 털었다. 천막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수진 엄마를 마주쳤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로 젖은 셔츠가 조금 창피했지만, 남 일 같지 않은 모녀에 마음이 쓰인 그는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수진 엄마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수진이는 어때요? 조금 아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열이 많이 나긴 하는데,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네? 열나요? 약은요?”

“여기서 무슨 약이에요. 다들 힘든데.”


승환은 아픈 딸을 남처럼 얘기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녀를 채근해 모녀의 천막으로 향했다. 어린 수진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아이는 말없이 가쁜 숨을 쉬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승환은 수진의 이마를 짚었다. 불덩이 같았다. 그는 수진의 엄마를 돌아봤다. 그녀는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제스쳐를 해 보였다. 승환은 입구로 달려가 군인들에게 해열제를 요청했다. 군인들은 의외로 쉽게 해열제를 건넸다. 천막으로 돌아온 승환은 수진에게 해열제를 먹였다. 수진 엄마는 승환의 모든 행동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아이의 호흡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리고 곧 잠들었다.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한 승환은 수진 엄마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기 아내와 딸의 모습이 수진 모녀와 오버랩 되어 감정이 과하게 이입된 것도 있었다.


“엄마 맞아요?”

“네. 맞는데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애가 아픈데 왜 그러고 있냐고요?”

“다들 어려운데 조금씩 감내해야죠.”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애가 저렇게 아픈데...”

“다 힘들잖아요.”


수진 엄마의 반응에 승환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다들 왜 이러지? 너무 차분하고 이상해!’


승환은 누가 봐도 난리일 법한 이 상황을 짓누르고 있는 차분함에 불쾌감을 느꼈다. 곧 묘한 기시감이 그를 스쳤다. 그리고 이내 며칠 전 기묘한 모자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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