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내린 비 탓에 호진의 구두는 이미 젖어 있었다. 그는 질척이는 양말을 애써 무시하며 법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법원 앞은 시위대, 경찰, 기자들로 북적였다. A그룹 총수의 법원 출두가 예정된 탓이었다. 위에서는 그룹 관련 민원인들, 각종 단체의 돌발상황에 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계열사별로 인원을 차출했고, 호진도 거기에 끼었다.
호진이 배정된 곳은 법원 앞 큰길 맞은편이었다. 호진은 괜히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으슥한 구석에 몸을 숨겨 구경꾼인 척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사람들은 지쳐갔다. 호진 역시 지루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설렜다. TV로만 봐왔던 그룹 총수를 직접 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었다.
총수를 기다리던 와중 몇 차례 소란이 일었다. 기자들은 ‘총수가 왔나?’ 하고 우르르 달려갔지만, 모두 술이 얼큰하게 취한 시위대 몇 사람의 고성 이벤트였다.
얼마 후, 호진은 전화를 받았다. 시위대가 예상보다 많다며 법원 앞으로 집결하라는 전화였다. 호진이 법원 입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고급 세단이 도착했다. A그룹 총수였다. 법원 입구가 크게 술렁였다. 오랜 기다림에 잔뜩 화난 시위대가 경찰 바리케이드를 무력으로 뚫으려 했다. 호진은 얼떨결에 경찰들과 함께 시위대를 몸으로 막았다. 혼란한 틈을 타 취객 하나가 깨진 병을 들고 접근했다. 이를 알아챈 경찰 넷이 그를 제압해 땅에 눕혔고 그의 손에 있던 병이 땅에 나뒹굴었다. 제압된 그는 땅에 눌린 채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는 강경 진압이라며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틈을 타 다른 취객 하나가 깨진 병을 주워들었다. 그는 비틀비틀 병을 휘두르며 A그룹 총수 쪽으로 다가갔다. 호진이 무의식적으로 그를 막아섰다. 왼손바닥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뜨뜻한 액체가 팔을 타고 팔꿈치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의 왼손은 피범벅이었다. 이를 놓칠세라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졌다. 그 사이 총수는 무사히 법원으로 들어갔다. 취객은 곧 제압됐지만, 출혈 탓인지,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탓인지 호진은 얼떨떨하게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행히 대기 중이던 구급요원 덕에 그는 응급조치를 받고 근처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다. 유혈사태에 머쓱해진 시위대는 유야무야 해산했다.
5cm 정도 베인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는 와중 그는 회사로부터 가급적 오랫동안 입원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의 상해를 언론용으로 써먹을 요량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호진의 아내는 괜찮냐며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아들 동훈은 뉴스에 나온 아빠를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희생이 가치 있는 행동이었음을 실감했다. 뿌듯했다. 상처는 조금 쓰릴 뿐, 아프지는 않았다.
퇴원 후, 밀린 업무 걱정을 안고 출근한 호진은 뜻밖에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사장은 그를 회사의 자랑이라고 한껏 치켜세운 것은 물론, 무슨 거창한 타이틀을 붙여 포상금에 휴가까지 지급했다.
오후 업무를 시작할 즈음 그는 그룹 비서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접견실에 앉아 대기하던 호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갖 생각이 들었다. 회장실 문이 열리자 잔뜩 긴장해 있던 호진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를 맞이한 건 회장이 아닌 비서실장이었다.
“어, 허호진 과장? 난 비서실장 강 전무야.”
“네. 안녕하십니까?”
“큰일 했어. 하마터면 회장님께서.”
“아닙니다. 그냥 얼떨결에.”
비서실장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요즘 친구답지 않게 겸손하네. 희생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들어보니, 일도 잘 한다던데, 성실하고.”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긴 한데... 곧 다시 연락할게.”
비서실장은 재차 흐뭇한 미소를 띠며 호진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회장님께서 직접 고르시고 각인까지 부탁하신 거야. 아참, 공은 치나?”
“아, 네. 골프 배운 지 6개월쯤 됐습니다.”
“그래? 잘됐네. 잘 배워두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그래, 바쁠 텐데, 가봐.”
호진은 자리로 돌아와 쇼핑백을 열었다. 쇼핑백 안에는 작고 고급스러운 상자가 들어있었다. 상자 속에는 호진이 듣도 보도 못한 명품 시계가 번쩍이고 있었다. 시계 뒷면에는 금속 테두리를 따라 ‘감사를 담아’라는 문구와 회장의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다. 호진은 이게 뭔가 싶었다. 얼떨떨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커다란 출셋길이 열렸음을 느꼈다. 그의 마음이 점점 환해졌다.
그 날의 유혈 사건으로 피해자 이미지가 덧씌워진 A그룹 총수는 대중의 동정 여론 덕인지, 아니면 화려한 변호인단 덕인지 당연하게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그 덕에 호진의 출셋길도 점점 공고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