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기독교사상> 2015. 8월호
돌아보면 신영복 선생의 글과 인연이 깊다. 80년대 말 대학 새내기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감옥 밖의 우리가 갇혀있고 감옥 속의 그가 참으로 자유롭다고 느꼈던 그 때부터였다. 연애 시절 지금의 아내가 그 책의 명문장들을 손수 적어 코팅해 만든 문장모음집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후배가 이천 부밖에 제작하지 않았다던 선생의 영인본 <엽서>를 생일선물로 전해주어 기뻤고, 거기서 '청구회 추억'을 읽으며 눈물짓던 추억이 있다. 생각의 깊이를 만들어가던 그 때 선생의 글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 가르침을 삶의 이정표 중 하나로 삼아왔다. 그러다 이제 중년에 들어서서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을 접하게 되니 여러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다.
그는 왜 그의 마지막 강의를 ‘담론’이라고 제목 붙였을까. 그의 강의는 이미 상식적인 강의가 아니고 그 형식을 깨고 공감을 지향하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강의는 누군가가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의의 상한이 '공감'이라고 말한다. 공감 이상의 강의 효과는 없다는 말이다. 현란한 지식에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그 지식에 따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식과 논리는 절대로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지식의 어떤 공감, 지식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공감이 그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현대 심리학이 하나같이 증언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공부가 지식 몇 줄을 전하는데 있지 않고 새로운 삶의 기초를 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강의는 공감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강의가 아니라 담론이다. 신영복의 지식이 아니라 신영복의 삶과 비전을 나누는 대화이다.
이어서 그는 공부를 이렇게 정의한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20)
공부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고 삶의 변화와 실천을 위해 하는 것일 때 더더욱 강의의 최대 목표는 공감일 수밖에 없고, 강의실의 풍경은 진솔한 대화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최대한의 겸손을 담은 존댓말로, 차분하게 우리에게 대화를 건네고 자신의 삶에서 느끼고 배운 지식과 지혜를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동양 고전에 근거를 둔 담론과 감옥과 여행을 통해 느낀 인간학에 바탕을 둔 담론이다. 이 두 바탕을 연결해주는 것은 모두 그의 감옥 체험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면서 그는 동양 고전과 사람이라는 두 가지 텍스트를 대면하며 살아갔다. 감옥에서 쉽게 책을 바꿀 수 없어 천천히 읽을 책을 고르다 동양 사상에 조예가 깊어졌다. 또 끊임없이 들고 나는 사람들과 만날 수밖에 없으니 인간에 대한 인식이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양 고전과 인간이라는 텍스트를 20년 이상 천착해간 사람은 많지 않겠다. 게다가 감옥이라는, 조밀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면벽 수도하듯이 고전과 인간을 마주했던 사람은 거의 그가 유일하다고 본다. 불가피한 상황을 필요한 희망으로 변화시켜 동양사상과 인간에 대한 사고의 경지를 한 차원 높여 놓은 것이 그의 담론이다. 그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와 우리 시대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동양고전을 논한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은 사실 지난 저서인 <강의 - 나의 고전독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책을 읽었던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 중복되는 내용이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다만 논의가 더 간결하면서도 깊어지고, 공감을 추구하는 강의의 형식에 맞게 우리 현실에서 동양고전을 어떻게 연결시킬지를 더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어 어느 정도 반복의 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동양고전 중에서 그가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시경,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한비자 등등이다. 시경, 주역을 제외하곤 모두 제자백가의 사상이다. 동양의 아주 오래된 사고가 반영되어 있는 시경, 주역에서 동양적 사고의 전형을 먼저 살피고, 춘추전국 시대 현실 타개의 사상으로 탄생했던 제자백가의 사상에서는 치밀하게 오늘의 대안을 찾아보고 있다. 그의 안내를 통해 우리는 동양의 고전이 낡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이 고전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안에 근대의 모순을 넘어설 수 있는 탈근대의 가치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동양고전 사고의 핵심은 결정론에서 비롯하는 차별과 억압의 사고를 넘어서 통일과 조화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동양적 사유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순과 대립의 통일과 조화가 세계 운동의 원리입니다. (196-197)
우리 시대의 비극은 계급이 결정되어 있고, 부가 결정되어 있고, 희망의 크기가 결정되어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동양고전의 사고는 이런 결정적 사고를 거부한다. 계급과 계급 사이, 계층과 계층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서로 연대하고 공감함으로 통일과 조화를 이루어 가라고 권하고 있다. 동양의 고전은 우리의 삶이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의 조직"임을 가르치고 있다. 삶이 관계의 조직일 때, 그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고 대립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보다 불행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동양 고전의 지혜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결정론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생성(being)"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형성해 나가길 그는 바라고 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부분이다. 20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배운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대부분 그의 첫 번째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필요한 문장을 골라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감옥에서 보낸 엽서 본문에 담긴 숨은 사실, 그 뒷이야기, 그 모든 걸 총체적으로 볼 때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면모를 배워가는 즐거움이 매우 크다. 개인적으로는 '청구회 추억'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더 즐거웠다.
그의 감옥 속 인간학은 이런 통찰을 얻는 데서 시작한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부모 만나서 그런 인생을 겪어 왔다면 지금 똑같은 죄명과 형기를 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29)
존재는 확률이고 가능성입니다. '접속'. 인식이 관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역시 관계입니다. '흑인은 노예다', 이것은 잘못된 진술입니다. 흑인은 흑인일 뿐입니다. 다만 특수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노예입니다. 흑인이 노예인 것은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고 내가 그에게 달려가서 꽃이 됩니다. 꽃이 되고 안 되고는 관계와 접속에 의해서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입술'은 악기가 되기도 하고, 음식물을 섭취하는 기관이 되기도 하고, 애정 표현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접속과 배치가 바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개념 '관계'입니다. (282)
사람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생각,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환경, 죄인을 만드는 관계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그가 설파하는 인간학의 출발점이다. 한 사람이 어떤 관계에 접속되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진다는 생각,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에서 개념을 빌려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인식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닿아 있다. 하늘 아래 본래부터 잘난 사람은 없다, 네가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하지 말아라,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부터 보는 자들이여. 그는 20년의 수감 생활을 통해 그 점을 깨달았던 것 같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게 되는 삶의 필연성, 그 앞에서 가져야 할 절대적 명제로서의 겸손.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 있습니다. 서로를 따뜻하게 해 주는 관계, 깨닫게 해 주고 키워 주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 (284)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통해 그 사람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동일한 입장에 서고,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최고의 관계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 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에게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공박 당하셨던 예수. 그분은 죄인의 입장에서 서서 그들을 꾸짖고 공격하기보다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끝내 하나님의 제자로 일어서게 하셨다. 삭개오의 사례가 그렇고, 우물가의 여인의 사례가 그렇다. 신영복 선생이 도달한 결론과 예수의 가르침이 겹치면서 매우 큰 감동을 느꼈다. 그가 주장했던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이 될 것인가. 그곳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곳이고, 그런 소식이야말로 복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感謝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232)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용인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하고 그가 다르다는 점을 용납하는 사고가 톨레랑스이다. 사실 억압과 차별이 상존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톨레랑스만으로도 상당히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관용과 톨레랑스가 다른 사람을 '타자'로 구별하고 나와 상관없는 공간으로 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고 그는 나에게로 다가가는 궁극적인 소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차이가 있어 내가 변할 가능성이 있음을 기뻐하고 서로를 배워가는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말한다.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변화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 신뢰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을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6)
그러나 그 변화 또한 혼자만의 것으로 머무르면 안 된다. 서로의 그 관계 속에서 완성해야 한다. 개인의 변화는 가슴 속에서 끝나지만, 인간관계 속에서의 변화는 실천으로 바뀌게 된다. 관계의 변화에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이 드러날 수 있다고 전한다.
그가 감옥에서 깨달은 이 지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성찰을 전해준다. 그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전하는 메시지의 크기도 적지 않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관용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 기쁜 존재로 섬김 받아야 한다. 성도들의 차이는 서로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변화의 계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늘의 가치를 중심으로 자기 삶을 혁신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교회 공동체일 것이다. 그러니 교회의 변화는 어느 목사, 어느 장로의 몫이 아니다. 공동체 안의 관계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발', 그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동양의 고전과 감옥 속 인간학을 거쳐 최종적으로 도달한 신영복 선생의 결론은 매우 소박하다. 감옥 속에서, 감옥 밖에서 각각 20여 년을 보내며 얻은 지혜의 핵심은 이것이다.
양심적인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408)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권하던 바울의 말이 떠오른다. 지식이 높은 사람도, 명예가 높은 사람도 세상을 바꾸는 최선의 행동에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인간의 가치를 다하는 사람들은 결국 잘난 사람이 아니라 양심적인 사람이었고, 그들이 끝까지 옳은 방향을 고수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위해 아름다운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자는 것, 이것이 노교수의 마지막 강의, 그 만만치 않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삶의 제안이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그렇게 살아가리라 마음 먹어본다. 그의 강의에 나는 완전히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