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그의 시대, 그리고 [맹자]라는 책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사상가이다.
본명은 맹가(孟軻)이다. 존경하는 성인(聖人)에게 성(姓) 뒤에 자(子)를 붙이는 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이다. 공자(孔子), 순자(荀子), 주자(朱子) 등이 다 그렇다. 만약에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았고 이름을 널리 펼친 성인이었다면 우리의 성 뒤에 자(子) 자가 붙었을 것이다. 필자가 그 시절, 그런 사람이었다면 최자(崔子)로 불렸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 학자 송시열(宋時烈)이 송자(宋子)라 불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그의 생몰연대를 BC372~289로 본다. 앞선 시대에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가 죽은 후 100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공자의 시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당연히 그는 공자에게 직접 배우지 못했고, 공자의 직계 제자에게도 배울 수 없었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자사(子思)의 문인(文人: 제자)에게서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孫子)인 공급(孔伋)의 자(字: 이름 대신 부르는 호칭)이다. 자사는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을 저술한 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공자가 늘그막에 가르쳤던 제자인 증자(曾子)에게서 배웠다.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유가(儒家)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확대하기 위해 애썼다. 정리하자면, 맹자는 자사를 따르는 한 유파(流派)에게서 배운 사람이다. 맹자 스스로 자신이 공자의 사도가 될 수는 없었고, 공자 유파에게서 사숙(私淑)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공자-증자-공급(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의 큰 흐름이 만들어진다. 이 흐름에서 맹자는 증자나 자사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맹자를 흔히 아성(亞聖)이라고 부르는데, 아(亞)는 ‘버금가다’라는 뜻으로, 성인(聖人)인 공자에 버금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사가 공자의 사상을 풀어낸 사람으로 술성(述聖)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교된다. 우리가 흔히 유가사상을 공맹(孔孟) 사상이라고 하는 것에 이런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공자가 인(仁)을 재발견한 사람이라면 맹자는 의(義)를 재발견한 사람이다. 유가는 이로써 인의(仁義)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맹자를 아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맹자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사기≫ <맹자순경열전>의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맹자 어머니를 다룬 ≪열녀전(列女傳)≫ 등 몇몇 문헌들에 의하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열녀전≫이라고 하니 아마 수절한 열녀(烈女)를 떠올리겠지만, 그게 아니고 나열할 열(列)자를 쓰는 열녀전이다. ≪사기≫ <열전>처럼, 역사에 기록할 만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나열한 전(傳)이다. ≪열녀전≫에 유명한 ‘맹모삼천(孟母三遷,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하다)’, ‘맹모단기(孟母斷機, 맹자의 어머니가 베를 자르다)’의 이야기가 나온다. ‘맹모삼천’은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이야기이다. 묘지 옆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다시 학교 옆으로 이사하며 어릴 때부터 유가(儒家)의 씨앗을 뿌렸다고 전한다. ‘맹모단기’는 공부를 끝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맹자를 꾸짖기 위해, 맹모가 짜고 있던 천을 잘라내며 “네가 학문을 그만둔 것은 바로 내가 이 천을 중간에서 잘라버린 것과 같다”고 하며 꾸짖어 맹자를 다시 공부에 몰두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 모두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배움을 각성시킨 이야기이다. 과부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맹자를 훌륭한 학자로 키우는데 무진 애를 쓴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지금도 홀로 사는 어머니들이 생활하기가 쉽지 않은데,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차별이 심했던 고대의 과부들의 처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조건에서도 맹자를 대학자로 길러냈으니 대단한 어머니임은 분명하다. 맹자가 당대 군주들이 자문(諮問)하는 대학자요, 동아시아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사상가가 되었으니 어머니의 바람은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유명 인물의 유적지와는 달리, 드물게도 맹자의 유적지에는 맹모의 무덤이 따로 잘 조성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맹자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정성 어린 교육 지도 속에서 좋은 스승을 찾아 공부하며 성장했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맹자가 활약한 시기는 전국(戰國) 시대이다. 흔히 말하는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후반부이다. 중국 문명의 실질적 시점(始點)이라고 볼 수 있는 주(周)나라가 무너져가던 시기를 춘추전국 시대라고 한다.
중국 고대의 주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주나라 이전에 하(夏)-상(商, 은(殷)이라고도 불림)이 있었다. 역사 시대는 흔히 상나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하지만 중국의 질서, 사상이 완비된 국가 체계는 주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다. 주나라는 중국 문화의 원형이 된다. 그 주가 무너지던 시기를 춘추전국 시대라 하고 이를 통일한 나라가 진(秦)나라이다. 진(秦)이 2대밖에 가지 못하고 초한(楚漢) 쟁패를 거쳐 한(漢)나라로 이어진다. 한이 망해가면서 우리가 잘 아는 위촉오(魏蜀吳)가 경쟁하는 삼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어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隋)-당(唐)의 통일국가로 이어진다.
주나라는 봉건제 국가이다. 쉽게 말하면 주의 왕(王)이 가장 형님이고 주에서 땅을 나누어 받은 제후(諸侯)들이 동생으로 지내면서 가족적 질서를 유지하던 국가 형태였다. 당대 중국의 영토는 지금보다는 좁았지만 그래도 굉장히 광대했고, 이를 중앙에서 다스리는 물적 토재나 역량은 부족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땅을 제후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군신의 예를 지키게 하며 느슨하게 다스리는 시스템이 자연스러웠다. 주나라 왕가의 혈통인 희(姬) 성의 친족들이 주로 분봉(分封) 받았고, 제나라의 강태공(姜太公)처럼 주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운 공신들도 일부 땅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동생 나라들이 제일 큰 형님 나라, 종주국(宗主國)인 주나라를 모시며 조공을 바치고 예를 갖추는 형국이었기에 가족적 질서, 즉 종법(宗法)제도의 국가라고 한다. 왕위와 제후 자리 장손에게 물려주던 이 때의 종법질서가 21세기 동아시아에서도 아직 통하고 있으니 우리는 여전히 주나라 종법 체계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때만 해도 중국이 지금처럼 넓은 나라가 아니었다. 중원(中原)이라고 해서 지금의 서안(西安)에서 정주(鄭州)에 이르는 황하 중하류 유역이 말 그대로 대륙 가운데의 나라, 중국이었다. 원래 중(中)자가 깃발을 형상화 한 것이라, 깃발을 중심으로 가운데 모인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다 주나라가 서북 유목민에게 공격당해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더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기는 일이 생긴다. 이때부터 기존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동주(東周)라고 부른다. ‘오랑캐’에게 쫓겨 큰형님이 도망간 셈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일로 주나라의 권위는 급속히 무너지게 된다. 그러자 다른 제후국에서 큰형님을 대신해 형님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동주 시대가 되면서 여러 제후국이 힘을 겨루는 춘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큰형님인 주나라를 대신해 여러 제후국을 모아 회의를 소집[會盟]하는 맹주(盟主) 노릇을 하며, 주나라의 봉건 체제를 유지·정비하는 힘을 가진 제후를 패자(霸者)라고 한다. 패자들이 주나라를 대신하는 힘의 시대가 춘춘시대이다. 제(齊)나라 환공이 첫 패자이고, 진(晉)의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 등의 순서로 춘추 시대 오패(五霸)로 꼽는다. 춘추 시대만 해도 패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주나라 왕(王)을 높이고[尊] 오랑캐[夷]를 무찌르자는[攘] 것이었다. 아직은 대의명분이 주나라를 지속시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나라의 봉건 질서는 유지되었다. 제후국들끼리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매우 신사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당시는 주로 전차전(戰車戰)을 치렀는데, 전쟁의 날짜와 시간도 서로 합의하여 진행했고, 전투가 벌어진 후 힘의 격차가 보이면 더 큰 희생을 만들지 않고 이른 시기에 승패를 결정지었다.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상대가 고개를 숙이면 협정과 조공으로 마무리했지, 패배한 제후국을 멸하지 않았다.
전국(戰國) 시대는 달랐다. 이름 그대로 나라들이 싸우는 시대인데, 이때부터는 싸움에서 진 상대 나라를 멸(滅)하고 복속시켜버렸다. 전국 시대는 진(晉) 나라(후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秦) 나라 아니고, 태항산 부근 중원에 위치했던 강국)의 하극상에서 시작되었다. 진의 대부(大夫)였던 조(趙), 한(韓), 위(魏) 세 가문이 봉기하여 진을 무너뜨리고 각각 제후국을 만들어 버렸다. 왕 밑에 제후가 있고, 제후 밑에 대부가 있는데, 대부가 스스로 제후를 칭했으니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크게 무너진 것이었다. 이로써 힘으로 나라를 무너뜨리고 자기 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열렸다. 이때부터는 나라 간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치열한 전쟁과 경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 일 이후로 조금 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제후들이 대부분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나라가 큰 형님이고 왕은 천하에 한 명 뿐이라는 생각조차 사라지고 왕들의 나라끼리 용호상박(龍虎相搏)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싸우면서 많은 제후국들이 사라져가고, 나중에는 강국 7개만이 남게 된다. 살아남은 연(燕), 제(齊), 초(楚), 조(趙), 위(魏), 한(韓), 진(秦)을 전국 시대의 칠웅(七雄)이라고 부른다. 진(晉) 나라가 분열되어 나온 조, 위, 한은 모두 칠웅에 들었다. 그러니 진(晉)이 얼마나 강한 나라였는지도 엿볼 수 있다. 이 일곱 나라가 쟁패하다가 마침내 진(秦)나라가 통일을 이루게 된다.
나라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선 시대이니 당연히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지상 과제였다. 말 그대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대 목표였다. 이 과제에 대한 답, 난세를 헤쳐가는 방법론, 심지어 그런 과제에 대한 반대 논리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가들이 논지를 펼치고 그것을 발전시켰는데, 이런 여러 사상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실제로 백 가지 사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만큼 다양한 부국강병의 지혜, 혹은 난세를 헤쳐 나갈 대답이 존재했기에 백가라고 했다.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농가(農家), 음양가(陰陽家) 등등의 사상 그룹들이 출현했다.
맹자도 대답을 지니고 있던 이 중 하나였다. 그는 공자로부터 비롯한 유가의 원리를 통치의 기본 원리로 주장했다. 전국시대를 종결시킬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유가의 원리였다는 말이다. 도덕과 양심을 설파하려는 의도로 사상을 가다듬은 것이 아니라 실제 통치 원리로 유가의 사상을 주장했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 제(齊)나라 선왕, 추(鄒)나라 목공, 등(滕)나라 문공, 노(魯)나라 평공 등에게 가 차례로 유세(遊說)하며 유가의 정신과 치세의 방법을 설파했다. 이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큰 나라의 제후들은 이미 왕이라 스스로를 칭했고, 작은 나라들은 아직 제후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 쓰이는 유세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들 군주들이 맹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국가의 통치 담론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당시 가장 인정받은 통치 사상은 법가(法家)의 사상이었다. 법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통치방법이다. 잘한 일에는 상을 주고 못한 일에는 벌을 준다. 이를 엄격히 집행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법가를 활용한 나라들은 나라의 힘을 키워 주변국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당시 귀족들은 벌을 받지 않고, 백성들을 상을 받기 어려운 신분제 시대였다. 그런데 법가는 상하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신상필벌하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국가 개혁에 가장 적합한 사상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나라로는 진(秦) 나라가 대표적이다. 진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뒤처진 후발 주자였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개혁에 더 앞장설 수 있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것도 법가의 개혁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강자, 제나라나 초나라는 개혁에서 뒤쳐져 멸망하고 말았다.
맹자는 평생을 애썼지만 실용적인 법가 사상의 유행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는 왕들을 자문하는 역할을 넘어 통치자가 되어보지 못했고, 공자처럼 물러나 후학을 기르는데 여생을 보냈다. 맹자의 사상, 넓게 보아 공맹의 사상은 춘추전국 시대에는 쓰이지 못했지만, 한(漢) 나라 이후 통일 중국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유가의 원리가, 싸울 때보다 평화 시기 국가를 잘 관리하고 안정되게 하는 데 가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조에도 유가의 사상을 따랐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현대 중국에서도 통치의 논리로 유가가 강조된다.
≪맹자≫에는 이렇듯 전국시대, 법가가 주요 담론이 되던 백가쟁명의 시기 왕들 앞에서 유세하는 맹자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맹자≫라는 책은 맹자가 유세에서 물러나 만장, 공손추 등등의 제자들과 작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맹자≫에는 맹자 자신의 품격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맹자가 직접 저술했든, 제자들이 정리한 것을 감수했든 맹자가 개입한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것이 완연히 후대 제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공자의 ≪논어(論語)≫와 다른 점이다. 오늘날에 읽어보아도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 자신의 정체성이 또렷이 드러나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맹자≫를 맹자의 저술로 보면서 읽는 것이 타당하다.
≪맹자≫에는 맹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