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3. 양혜왕 상 1.3
문장 3
맹자가 양혜왕의 고문으로 여러 자문을 하던 어느 날, 양혜왕이 짐짓 자랑스레 맹자에게 말했다.
“과인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 백성을 풍년이 든 하동으로 이주시켜주고, 하동의 곡식을 하내로 옮겨 피해를 줄여줍니다. 하동에 흉년이 들면 반대로 해서 백성의 피해를 줄여줍니다. 이웃 나라에서 어찌하나 살펴보아도, 과인과 같이 백성을 위해 마음을 쓰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오지 않아 과인의 백성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맹자가 비유를 들어 대답하여 말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진군의 북이 크게 울려, 병사들이 맞싸우며 병기가 서로 부딪치는데, 일부 병사들이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면서 달아났습니다. 어떤 이는 백 걸음 도망간 후 멈추고, 어떤 이는 오십 걸음을 도망간 후에 멈추었습니다. 그러다 오십 걸음 간 자가 백 걸음 간 자를 보고 비겁하다고 비웃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왕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오십 걸음 달아난 자도 단지 백 걸음이 아닐 뿐, 달아난 것은 마찬가지지요.”
맹자가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왕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백성이 이웃 나라보다 많기를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왕께서 선행을 많이 베푸신다고 하지만, 백성들이 보기에는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선정(善政)을 베푸시려면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전쟁한다거나, 공사를 한다고 백성들을 동원해서 농사의 때를 어기지 않으면 당연히 농사가 잘되어, 거둔 곡식을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해질 것입니다. 지금의 이익을 위해 촘촘한 그물을 써서 못의 물고기를 마구 잡아들이지 않는다면, 물고기와 자라가 잘 자라 그 수확이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벌목도 제때를 지켜 숲이 망가지지 않게 조절하면, 산의 목재는 모두 쓸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자라가 넘치고, 목재도 넉넉해지면, 백성이 자기 가족들을 부양하고 돌아가신 가족을 예의를 갖춰 장사지내게 하는 데 아무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유감이 없는 것, 그것이 왕도(王道)의 시작입니다.
백성들이 각각 집마다 5무의 땅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면, 부드러운 옷을 입어야 하는 쉰 넘은 어른들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과 돼지와 개 등 가축을 기르는 데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잘 해내면, 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 일흔이 넘은 어른들에게 걱정 없이 고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집마다 100무의 밭을 주어 제때 농사짓게 한다면, 식구가 많은 가족이라도 굶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상(庠)과 서(序)와 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힘쓰고, 거듭해서 상하 관계의 예의, 수평적 관계의 우애에 대해 가르치면, 나이 든 어르신들이 길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지지 않고, 젊은이들이 서로 그것을 들어주는 아름다운 질서가 생길 것입니다. 노인들이 편안히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영양을 보충하고, 어떤 백성도 추위에 떨지 않고 굶주리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못한 사람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반대로 힘과 돈 있는 집에서 개와 돼지가 호강하며 사람이 먹는 것을 먹는 횡포가 있는데도 단속하지 못하고,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있어도 공공 식량을 풀어 구제할 줄 모르는 왕은 아마도 백성들이 죽으면 말하길, ‘내가 아니라, 어려운 시절이 죽인 것이다’ 하겠지요. 이것은 칼로 사람을 죽여놓고 ‘내가 아니라, 칼이 그랬다’ 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왕께서 애꿎은 흉년 따위 핑계를 대지 않으시고 백성을 진심으로 살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이 나라로 몰려올 것입니다.”
양혜왕이 말했다. “과인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梁惠王曰: “寡人之於國也, 盡心焉耳矣! 양혜왕왈: “과인지어국야, 진심언이의!
하내에 흉년이 들면, 그 백성을 하동으로 이주시켜주고, (하동의) 곡식을 하내로 옮겨 줍니다. (그렇게 피해를 줄입니다) 하동에 흉년이 들어도 역시 그렇게 합니다.
河內凶, 則移其民於河東, 移其粟於河內, 河東凶亦然. 하내흉, 즉이기민어하동, 이기속어하내, 하동흉역연.
이웃 나라의 정치를 살펴보니, 과인과 같이 마음을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察隣國之政, 無如寡人之用心者. 찰인국지정, 무여과인지용심자.
(그런데도) 이웃 나라의 백성은 줄어들지 않고, 과인의 백성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隣國之民不加少, 寡人之民不加多, 何也?” 인국지민불가소, 과인지민불가다, 하야?”
맹자가 대답하여 말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孟子對曰: 王好戰, 請以戰喩. 맹자대왈: 왕호전, 청이전유.
북이 크게 울려, 병기가 서로 부딪치는데,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면서 달아났습니다.
塡然鼓之, 兵刃旣接, 棄甲曳兵而走, 전연고지, 병인기접, 기갑예병이주,
혹자는 백 걸음 간 후 멈추고, 혹자는 오십 걸음을 간 후에 멈추었습니다.
惑百步而後止, 惑五十步而後止. 혹백보이후지, 혹오십보이후지.
오십 걸음 간 자가 백 걸음 간 자를 비웃는데, 어떻겠습니까?
以五十步笑百步, 則何如?”1 이오십보소백보, 즉하여?”
(왕이) 말했다. “그럴 수 없지요! 단지 백보가 아닐 뿐(耳), 역시 달아난 것이지요.”
曰: “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 왈: “불가! 직불백보이, 시역주야.”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 그것을 아신다면, 백성이 이웃 나라보다 많기를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曰: “王如知此, 則無望民之多於隣國也. 왈: “왕여지차, 즉무망민지다어인국야.
농사의 때를 (전쟁, 공사 등의 징발로) 어기지 않으면, 그 곡식이 모두(勝) 먹을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不違農時, 穀不可勝食也; 불위농시, 곡불가승식야;
촘촘한(數(촉)) 그물을 큰 못에 넣지 않는다면(작은 고기를 함부로 잡지 않는다면), 물고기와 자라를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數罟不入洿池, 魚鼈不可勝食也; 촉고불입오지, 어별불가승식야;
크고 작은 도끼도 때에 맞게 산림에 들게 하면(제 때를 지켜 나무를 베면), 목재는 모두 쓸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斧斤以時入山林, 材木不可勝用也. 부근이시입산림, 재목불가승용야.
곡식과 물고기·자라를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이고, 목재를 모두 쓸 수 없을 정도면, 백성이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게 하는데 아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穀與魚鼈不可勝食, 材木不可勝用, 是使民養生喪死無憾也. 곡여어별불가승식, 임목불가승용, 시사민양생상사무감야.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유감이 없는 것, 그것이 왕도(王道)의 시작입니다.
養生喪死無憾, 王道之始也.2 양생상사무감, 왕도지시야.
집마다 5무의 땅에 뽕나무를 심으면, 쉰이 넘은 사람들이 비단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五畝之宅樹之以桑, 五十者可以衣帛矣; 오무지택수지이상, 오십자가이의백의;
닭과 돼지와 개 등 가축을 기르는데 때를 놓치지 않으면, 일흔이 넘은 이들에게 (걱정없이) 고기를 먹일 수 있습니다.
鷄豚狗彘之畜無失其時, 七十者可以食肉矣; 계돈구체지축무실기시, 칠십자가이식육의.
(집집마다) 100무의 밭을 주어 그 (농사의) 때를 빼앗지 않는다면, 여러 명의 식구를 가진 가족이 굶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百畝之田勿奪其時, 數口之家可以無飢矣; 백무지전물탈기시, 수구지가가이무기의.
상(庠)과 서(序)(와 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힘쓰고, 거듭해서(申) 효제(孝悌)의 의(義)를 가르치면, 반백이 된 사람이 길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지지 않을 것입니다.
謹庠序之敎, 申之以孝悌之義,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 근상서지교, 신지이효제지의, 반백자불구대어도로의.
일흔 살 넘은 사람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여느 백성들이 추위에 떨지 않고 굶주리지 않게 하고서도, 왕 노릇 못한 사람[不王者]은 지금껏 있지 않았습니다.
七十者衣帛食肉, 黎民不飢不寒, 然而不王者未之有也. 칠십자의백식육, 여민불기불한, 연이불왕자미지유야.
(힘과 돈 있는 집에서) 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는 것을 먹는데 단속하지 못하고, 길에 굶어 죽은 사람[莩]이 있어도 베풀[發] 줄 모르며,
狗彘食人食而不知檢, 塗有餓莩而不知發, 구체식인식이부지검, 도유아표이부지발,
백성들이 죽으면 말하길, ‘내가 아니라, (어려운) 시절[歲]이 그랬다’ 하니,
人死則曰 ‘非我也, 歲也’, 인사즉왈 ‘비아야, 세야’,
이것이 칼로 사람을 죽여놓고 ‘내가 아니라, 병기가 그랬다’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是何異於刺人而殺之曰 ‘非我也, 兵也’. 시하이어척인이살지왈 ‘비아야, 병야’.
왕께서 (어려운) 시절에 죄를 묻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이 나라로) 다다를 것입니다.”
王無罪歲, 斯天下之民至焉. 왕무죄세, 사천하지민지언.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혜왕은 자기 나라 한 지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세심히 배려한다고 자랑한다. 흉년이 든 지역의 백성을 풍족한 곳으로 옮겨 주고, 곡식도 떼어준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웃 나라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은 그리 배려하는데 왜 백성들이 늘지 않느냐고 묻는다. 1.1에서 이야기했듯이 당시에는 국경이 지금과 같지 않았고, 백성은 더 좋은 나라를 찾아 이동하던 시기였다. 나름으로 진심(盡心)을 기울이는데 위나라로 찾아오는 백성이 없냐는 말이다.
맹자는 전쟁에서 오십 보 달아난 병사와 백 보 달아난 병사의 예를 들면서 혜왕의 조치가 이웃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나은지는 몰라도, 절대적인 선정(善政)은 아니라고 한다. 혜왕의 대책은 일시적인 구제책에 불과하고, 그것을 넘어 완전한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도에 다다르기 전의 모든 정치는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의 정치에 불과하다.
맹자는 항상 근본을 성찰하라고 한다. 양혜왕 상의 첫 문장에서 이(利)가 아닌 통치의 근원의 되는 의(義)를 살피라고 한 것과 같은 관점이다. 한 두 가지 정책의 효과를 살피지 말고, 근원적인 통치의 핵심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것이 왕도(王道)이다.
왕도(王道)라는 말은 원래 ≪서경(書經)≫ <홍범(洪範)> 편에 나온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함부로 뒤집고 기울게 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蕩平)하다고 했다.(이 말에서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가 힘쓴 ‘탕평책(蕩平策)’이라는 말도 나왔다) 어디에도 기울지 않게, 치우치지 않게 정치하면 왕도의 길이 순탄하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 왕도라는 말을 정치의 목표로 설정하고 구체화했다.
왕도를 이루려면 ‘경제적 풍요’와 ‘충분한 교육’이 완성되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백성들이 “산 사람을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유감이 없는” 상태를 이루는 게 왕도의 시작이라고 했다. 맹자가 본 최소생계의 기준은 살아가는데 유감이 없고, 장례로 상징되는 의례(儀禮)를 충실히 드릴 수 있느냐 여부였다. 우리는 흔히 유가(儒家)가 경제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공맹(孔孟)의 글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제자백가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유가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안정 위에서 인의(仁義)를 강조한 학파이다. 이후의 글에서 맹자는 이것을 ‘항산(恒産)’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경제를 바탕으로 도덕을 설파하는 것은 중국 사상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교육의 측면에서는 ‘효제(孝悌)의 의(義)’를 익히는 것이 왕도의 길이라고 했다. 효(孝)는 수직적 관계의 예의(禮儀)와 공경(恭敬)을 말한다. 부모-자식, 왕-신하와 같은 수직 관계에서,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자애롭게 대하고, 아랫 사람은 윗사람에게 마음을 다해 존경을 표하는 일이다. 제(悌)는 수평적 관계의 예의(禮儀)와 공경(恭敬)을 말한다. 형-제, 자-매, 벗-벗 간에 우애(友愛)를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태도이다. 수직-수평 관계에서 진실한 질서를 교육에서 실현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를 안정시키고, 사회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왕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왕도론은 이후의 문장에서도 계속 강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