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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산 Mar 19. 2024

정의가 이익보다 중요하다

문장 1 - 양혜왕 상梁惠王 上 1.1 

문장 1


#1.1


(전국시대 후반, 완숙한 학자인 맹자가, 전성기를 지나 양나라라 불리던 위나라 혜왕을 만났다.)

노회한 혜왕이 물었다. 

“노선생께서 추 나라에서 여기까지 천 리도 넘는 길을 와주셨군요. 덕분에 우리 위 나라가 부국강병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요?”

초대비용을 많이 치른 왕으로서 자기에게 줄 이익을 묻는 것은 상식이었다. 

맹자가 옷매무새를 고치며 대답했다. 

“왕께선 어찌 이익을 이야기하십니까? 제가 드릴 말씀은 오직 인의(仁義)에 대한 것입니다. 제일 윗사람이신 왕께서 이익을 얘기하시면 아랫사람들도 이익을 이야기하겠지요. 왕께서 ‘어찌해야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골똘하시면, 대부도 자기 땅[家] 위에 ‘어떻게 이익을 만들까’ 골똘할 것이고, 선비와 백성들도 제 한 몸의 이익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위아래에서 모두 이익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하나를 가진 사람이 둘을 갖고 싶어 하고, 열을 가진 사람이 스물을 갖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왕을 시해하는 자는 천 대의 전차를 가진 대부일 것이고, 천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왕을 시해하는 자는 백 대의 전차를 가진 대부일 것입니다. 만 대의 전차 중 천 대를 가졌고, 천 대의 전차 중 백 대를 가졌으니 절대로 적지 않게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를 멀리하고 이익을 가까이하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하극상(下剋上)이 벌어지겠지요. 인의(仁義)를 중시하는 나라에선 인자한 사람이 많아 부모를 버리지 않고, 정의로운 사람이 많아 왕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 인의(仁義)를 말씀하셔야지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본문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孟子見梁惠王 1 맹자견양혜왕

왕이 말했다. 노선생(叟),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왕왈: 수불원천리이래

장차 우리나라에 이익(利益)이 있겠지요?

亦將有以利吾國乎? 2 장차유이리오국호?”

맹자가 대답했다. “왕이시여,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맹자대왈: 왕하필왈리?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亦有仁義而已矣. 역유인의이이의.

왕께서 말하시되, 어찌해야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시면

王曰 ‘何以利吾國’, 왕왈 ‘하이리오국’, 

대부도 말하되, 어찌해야 내 봉지에 이익이 될까, 하니

大夫曰, ‘何以利吾家’, 대부왈, ‘하이리오가’,

선비와 백성들도 말하되, 어찌해야 내 한 몸에 이익이 될까, 하니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사서인왈, ‘하이리오신’,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에는 위기가 됩니다. 

上下交征利而國危矣. 3 상하교정리이국위의.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 대의 전차를 가진 대부[家]입니다. 

萬乘之國 4, 弑其君者 必千乘之家 만승지국, 시기군자 필천승지가

천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에서, 그 임금을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 대의 전차를 가진 대부입니다. 

千乘之國, 弑其君者 必百乘之家. 천승지국, 시기군자 필백승지가. 

만에서 천을 취하고, 천에서 백을 취했다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만취천언, 천취백언, 불위부다의. 

그러나 의를 뒤로 하고 이익을 앞세운다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苟爲後義而先利, 不奪不饜. 5 구위후의이선리, 불탈불염.

인자한 사람이 그 부모를 버린 적이 없었고

未有仁而遺其親者也, 미유인이유기친자야, 

의로운 사람이 그 군주를 뒤로 한 적이 없습니다. 

未有義而後其君者也. 미유의이후기군자야. 

왕께서는 오직 인의(仁義)를 말씀하시지, 하필 이익이십니까? 

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왕역왈인의이이의, 하필왈리?



1. 양혜왕(梁惠王)


  양(梁)나라의 혜왕(惠王). 주(周)나라에 이어 춘추 시대까지 왕은 오직 주의 왕밖에 없었으나, 전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렇게 제후들이 모두 왕이 되자, 후에 진(秦) 왕이 중국을 통일시키고 왕이라는 이름에 만족하지 못하여 더 높이는 이름을 찾은 것이 황제(皇帝)이다. 그래서 진 왕 영정은 ‘진시황(秦始皇)’, 진나라를 시작한 황제로 불렸다. 이후로 중국의 왕을 황제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제후들은 왕으로 부르게 되었다. 우리 조선도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했는데, 우리의 임금을 왕이라 불렀다. 조선 말, 중국에 대한 사대 제도를 폐지한 후에야 ‘대한제국’이라 명명하며 고종이 황제로 칭하게 되었다. 

양(梁)이라는 나라 이름이 낯설다. 실은 위(魏)나라를 말한다. 춘추 시대의 진(晉)나라를 셋으로 나눠 가졌던 대부의 나라 중 하나가 위(魏)이다. 대부가 제후를 넘어 왕이 되었으니 신분이 두 계급 상승한 셈이다. 춘추 오패의 하나였던 진(晉)나라가 어찌나 강했던지 조, 한, 위 셋으로 나뉘고도 세 나라 다 전국 시대의 강자가 되었다. 위(魏)나라도 주변 나라를 복속하고 서쪽의 진(秦)과 동쪽의 제(齊)에 맞서던 강국이었다. 그러다 3대 왕인 혜왕에 이르러 무너지기 시작했다. 혜왕이 걸출한 인물 상앙(商鞅, 원래 이름은 공손앙(公孫鞅)인데 후에 진에서 상(商) 땅을 봉읍으로 받아 상앙으로 불렸다)을 진(秦)나라로 내쫓은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상앙은 진 나라에서 변법(變法, 법을 통한 변화와 개혁)을 이끌며 진을 단기간에 강국으로 끌어올리고, 자신을 내쳤던 위나라를 쳐서 상당한 영토를 빼앗았다. 위나라는 땅을 잃게 되자 도읍인 안읍이 진과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 수도가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국경에 맞닿게 된 것이다. 불안에 떨던 위나라는 안읍보다 동쪽에 있는 대량(大梁)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부터 위나라를 양 나라로 부르게 되었고, 혜왕을 양(梁)의 혜왕이라고 불렀다. 

  혜왕의 재위 기간은 BC 369~319년으로 50년에 이른다. 고대의 왕으로서는 재위 기간이 상당히 길다. 대량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 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애썼다. 몸을 낮추어 현자(賢者)들을 많이 초빙했다. 맹자도 그렇게 초빙된 사람 중 하나였다. 맹자를 만날 때는 재위 말년이었다. 노회할 대로 노회한 왕이었다. 죽기 한 해 전(BC 320년)의 일이라고 ≪사기≫ <혜왕 세가(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 맹자의 나이는 쉰셋이었다. 맹자도 무르익은 학자였다. 노회한 왕과 중후한 학자의 첫 만남부터 긴장이 팽팽하다. 이때를 맹자의 유세 시작점으로 본다. 


2. 이익(利益)


  혜왕은 맹자에게 먼 길을 오셨다고 치하했다. 맹자의 고향 추(鄒)에서 위(魏)는 실제로 아주 먼 거리이다. 옛 추나라는 중국 동쪽, 지금의 산동성에 있었고, 위나라는 중국 중북부에 위치했다. 이 만남은 혜왕이 맹자를 초대해서 성사되었다. 맹자 일행의 차비며 숙박비며 자문비 등등 상당한 비용을 혜왕이 댔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그 비용에 값하는 이익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이렇게 비용을 들여 정치적 대안을 가진 선비들을 초대해 공부하고 유세를 듣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재야(在野, 성 밖 벌판[野])에 사는 사람. 성 안에 사는 국인(國人)과 구별된다) 인사였으나 제 환공에 발탁되어 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이 좋은 선례이고, 위에서 태어났지만 진 효공에게 발탁되어 진을 부강하게 한 상앙이 가까운 예이다. 혜왕은 당시 시대 흐름대로 자기 나라를 부강하게 할 묘책을 듣고 싶어 했다. 

  맹자는 바로 그 상식을 뒤집는 발언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이(利)가 아니라 인의(仁義)라고!


3. 왕(王) - 대부(大夫) - 선비[士] - 백성[庶人]


  맹자는 이익과 인의의 대비를 말하면서 주(周) 당대 상하 질서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다. 당대의 상하 질서는 왕 – 제후 – 대부 – 선비 – 백성의 순서였다. 왕이 천하(天下)를 다스리되 그 넓은 땅을 다 다스릴 수 없으니 제후들에게 땅을 나누어 나라[國]를 다스리게 했다. 제후들의 나라도 넓어서 이를 다시 나누어 대부들에게 주고 자기 영역[家]을 다스리게 했다. 땅을 세습하는 계급은 왕, 제후, 대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옛 중국에서 가(家)는 지금의 가족 단위가 아니라 씨족을 넘어서는 봉지(封地)를 의미한다. ≪대학(大學)≫에서 말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제가(齊家)’ 역시 오늘날의 가족 단위가 아니라 상당히 큰 봉지를 잘 다스린다는 말이다. ‘가:대부 → 국: 제후 → 천하: 왕’의 순서이다. 다만 전국 시대에는 제후들의 스스로 왕이 되었기에 제후의 단계가 생략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 진의 영정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라는 이름을 지을 만도 했다. 

  우리말로 선비라고 부르는 사(士) 계급은 땅을 물려받는 세습계급이 아니었다. 서인이 노력하여 자기 능력을 키워 제후나 대부의 관료로 일하게 되면 사(士)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윗글에서 사(士)와 서인(庶人)은 땅이 아니라 몸[身]의 이익을 말할 수밖에 없다. 사(士) 계급 중 아주 뛰어난 사람들은 봉지를 받아 대부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대부에 오르면 세습계급이 되었다. 이렇듯 사(士) 계급은 자기 능력에 따라 관직을 받는 사람들이어서 자기 계발을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다. 제나라 관중(管仲)이 당대의 롤모델이었다. 공자나 맹자가 열심히 공부한 것도 관직에 나가 분봉 받는 방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공자와 맹자에게 많은 제자가 있었던 이유도 그 공부가 출세(出世)에 실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은 공부를 통해 대부의 지위로 나아간 실례가 된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야말로 선비들의 공통된 꿈이었다. 우리의 조선 시대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나아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선비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대부 등 세습 귀족, 그 기득권 세력이 하지 못하는 개혁 조치를 선비들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군주들이 뛰어난 선비를 통해 일을 도모한 사례가 많다. 제자백가를 일군 것도 이들이었고, 부국강병을 실현한 것도 이들이었다.

  서인은 백성[民]을 말한다. 백성을 뜻하는 민(民)의 갑골문 형태를 보면 한쪽 눈이 찔린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양이다. 시력의 균형을 깨뜨려 도망가거나 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던 고대의 억압 상황이 반영된 자형(字形)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백성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나라 간 경쟁이 백성의 숫자와 긴밀히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농업이 발달해 생산의 중심이 되는 시대에 그 일을 담당하고, 전쟁이 잦아지는 시기 싸울 사람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귀족과 사 계급이 전쟁의 주축이 되던 춘추 시대의 전차전(戰車戰) 중심에서 전국 시대의 보병전(步兵戰)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백성의 숫자는 더 중요해졌다. 사실 제자백가의 사상은 한 나라에 얼마나 많은 백성을 살게 하느냐, 살만하게 하느냐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 고대 시기에는 지금과 같은 국경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민(民)은 나라의 수준, 복지 등을 보며 옮겨 다니곤 했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 네 계급이 상호 인의의 관계로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를 바랐다. 이들 사이에 이익이 개입되면 계급 간의 무한 경쟁이 불 보듯 뻔했다. ‘위아래가 모두 이익을 취하는’ 악순환이 시작되지 않게 고리를 끊어내려면 상위 계급이 모범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왕이 인의(仁義)로 아랫사람을 대하면 인의의 흐름이 물이 아래로 흐르듯 흘러 내려간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맹자는 이 방법만이 진정한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4. 만승지국(萬乘之國),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


  춘추전국 시대 전투의 핵심은 전차(戰車)였다. (아래 사진 참조) 지금과 비교하자면 탱크를 떠올리면 비슷하겠다. 전차가 전투의 선두에서 적진을 유린하면 따르는 보병들이 마무리하는 개념의 전투였다. 전차에는 운전자, 극(戟, 창끝에 낫과 같은 날이 달린 무기)을 든 사람, 활을 쏘는 사람, 셋 정도가 탔다고 전해진다. 전차를 타는 사람은 주로 귀족과 사(士) 계급이었다. 그래서 당시 선비가 갖추어야 할 육예(六藝, 여기서 예(藝)는 기술을 의미한다. 영어의 art에 해당)에 전차를 모는 기술인 어(御)와 활을 쏘는 능력인 사(射)가 포함되어 있었다. (육예 전체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이다) 


서주(西周) 시대 전차 모형 (산동(山東) 전차박물관 전시물, 직접 촬영)


  그래서 당시 전차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부국강병의 척도였다. 전차를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드니 부자 나라가 아니면 전차가 많을 수 없었고, 전차를 운용하려면 병력이 많아야 하니 병력이 많지 않으면 많은 전차가 소용없기 때문이다.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는 그만큼 강하고 잘 사는 나라일 수밖에 없다. 

전국 시대 만승지국은 7개로 꼽는다. 흔히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리는 진(秦), 초(楚),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나라였다. 전국 시대 후기는 이 일곱 나라의 쟁패로 정리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법에 성공한 진(秦)의 독주가 시작되고, 진이 다른 여섯 나라를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중국의 통일제국 진(秦)이 등장하게 된다. 이 진이라는 이름에서 중국을 일컫는 ‘지나’라는 말이 나오고 ‘차이나’라는 이름으로 발전해간 것이다. 

  만승지국 아래 천승지국(千乘之國), 즉 천 개의 전차를 가진 나라라고 언급된 나라들은 전국칠웅(戰國七雄)을 제외한 작은 나라들을 일컫는다. 만 개나 천 개나 정확한 숫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등급의 상징적 의미라고 보는 게 맞다. 황제에게는 만세(萬歲)를 외치고 제후에게는 천세(千歲)를 외치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제후국을 표방한 조선의 왕에게 신하들은 천세(千歲)를 외쳤다. 조선이 제후국을 표명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당시 중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고 동아시아의 체계였다. 당시 그 체계 안에 있는 것은 문화국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일로 여겨졌다.)

  만승지국의 왕을 해칠 사람은 만 개의 전차 중 천 개를 가진 대부들일 것이고, 천승지국에서 왕을 해칠 사람은 천 개의 전차 중 백 개를 가진 대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익을 중시하면 바로 그 욕망으로 바로 아랫사람에 의한 배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 전국 시대는 진(晉)의 세 대부가 하극상을 일으켜 시작되었다. 맹자가 지금 유세하고 있는 위(魏) 나라 역시 하극상을 통해 왕의 나라가 된 바 있으니, 이익을 앞세우면 이런 일들은 계속 반복되리라는 것이다. 


5.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한다. 


  만 중에 천을 가진 대부, 천 중에 백을 가진 대부들이 적게 가졌다고 할 수 없으나, 사회가 이익을 위해 쟁투하는 분위기라면 반드시 천을 넘어 만을, 백을 넘어 천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이 가진 윗사람의 것을 취하는 길뿐이다. 그래서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에는 위기’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인가? 인(仁)과 의(義)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의(仁義)로 나라가 다스려질까? 그 약육강식, 전쟁의 시기에? 맹자는 분명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에 대한 대답이 장구한 문장으로 뒤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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