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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실록>

박영규, 웅진지식하우스

by 형산

일본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분노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제가 무엇을 잘못했고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지식이 매우 표피적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미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요령있게 역사를 정리하는 능력이 검증된 사람의 책을 통해
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다.
기대대로 매우 적절히 요약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읽었던 인상적인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조금 인용해본다.

1919년 9월 2일, 부임을 위해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수류탄 한 발이 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수류탄 파편에 수십 명이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었다. 불행히도 암살 대상이었던 사이토는 무사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인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길림성 지부장 강우규였다. 1855년에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그는 이때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의 직업은 한의사였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떠돌며 때론 한의사로 때론 훈장으로 살아가던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복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5년엔 야오허강 주변에 농토를 개척하여 한 인촌을 건설했고, 1917년에는 길림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자가 되었다.
삼일운동 후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자, 1919년 8월에 새로 부임하는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한반도로 잠입했다. 마침내 수류탄 한 발로 사이토의 부임 행렬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사이토는 죽지 않았지만 정무총감이 부상을 입었고 총독의 수행원과 경찰들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현장을 빠져나온 강우규는 동지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 임승화의 집에 숨어 지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 탄압에 앞장섰던 총독부 고등계 형사이자 일제의 앞잡이였던 김태석에게 꼬리를 밟히고 말았고, 결국 거사 15일 만에 붙잡혀 수감되었다. 이후 총독부 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재판중에 한치 물러섬 없이 당당했고, 자신의 행위는 나라를 빼앗은 도둑들에 대한 응징의 일환으로 정당하며, 어떠한 잘못도 없다고 말했다. 사형 당하기 직전 이런 시를 남겼다.

단두대상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이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 179-180쪽.

한일합병 후 이상재는 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전람회에서 을사오적인 이완용, 박제순 등과 마주 앉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상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셔야겠습니다."
이 말에 이완용과 박제순은 무슨 뜻인지 영문을 몰라 했다. 그러자 이상재가 이렇게 덧붙였다.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데 선수 아니십니까? 그러니 대감들이 일본으로 이사 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재는 풍자와 재치가 뛰어나고 민족의식도 분명한 인물이었다.
- 252쪽

한용운이 남긴 일화 중에 유명한 것이 있다. 최남선이 변절하여 친일을 선언한 날 한용운은 최남선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에 탑골공원 에서 최남선이 인사를 건네자 "당신이 누구요?"라고 했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했더니 한용운이 이렇게 말했다.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
-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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