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시켰으면 돈을 주세요
아래는 <출퇴근 없는 삶>의 목차이자 시리즈 첫 글
지난 몇 주는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기간이었다. 보통은 프리랜싱을 진행하다 보면 계약 기간에 딱 맞춰서 프로젝트가 끝나는 일은 드물고, 꼼꼼하게 체크하더라도 클라이언트에서 추가로 요청사항이 생기기 때문에 기간은 조금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원래 다른 일을 할 때도 기한을 정해놓고 그 안에 업무를 마무리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기간이 늘어나면 스트레스로 느껴졌지만 요즘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업무에 계속해서 '정'이라는 요소를 접목하려는 한국의 정서상 비교적 단순한 업무 추가는 추가 비용 없이 처리해주곤 한다. 결국 시간으로 일하는 프리랜서에게 고스란히 비용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전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다. 물론 아예 작업량이 많은 기능 추가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추가 비용과 추가 기간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더 곤란한 점은 프로젝트가 끝났는데 입금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프로젝트가 끝났다는 것은 단순히 '프로그래머가 개발을 마쳤다.'가 아니라 '충분한 테스트 기간을 가졌고, 클라이언트에서도 수정 사항이나 추가 사항에 대한 모든 요구 사항을 반영하였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잔금이 제때 입금이 되지 않는다. 이건 문제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는 업체에게 칼 같이 기간을 엄수하길 원하면서 정작 계약서에 적혀있는 잔금 처리일을 제때 맞추지 않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나는 여기서 한국에서의 '갑'과 '을'의 관계를 본다. 프리랜서 개발자를 개발 에이전시라고 보면 크게 클라이언트에게 '프로그래밍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에이전시와 클라이언트의 역할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인 에이전시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보다 나은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관계가 많이 왜곡돼서 클라이언트는 '갑'으로서 비용을 지불하니까 '을'을 마음대로 착취하는 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아무리 불합리한 요구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않으면 잔금 지불을 미뤄 버린다. 그리고 크게 문제가 없더라도 혹시 모르니 대금 지급을 미룬다. 그러면 클라이언트는 분명 계약서 상에 명기된 업무를 다 마무리했는데도, 잔금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물론 재벌의 나라에서 많은 산업 분야가 재벌 기업 아래 하청 아래에 재하청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구조에서 '을'이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국 일거리가 없어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납품할 곳이 없으니 더러운 꼴을 당해도 입을 다물고, 클라이언트가 가격을 후려쳐도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워낙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다 보니 관계가 좋아야만 사업이 가능하고 그러니 술 접대와 관계 유지에만 매달린다. 요즘 중국의 성장에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은데, 다들 기술 개발에 매진해야 할 시간에 술 접대에 시간을 보냈으니 기술력이 나아질 턱이 있나.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술 개발이라는 것은 이윤이 나야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인데 대기업의 횡포에 쥐어짜인 중소기업은 내일이 없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 그리고 이러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을'을 막대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것 같다.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합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는 몸을 낮춰야 하는 이 사회는 건강한 것일까?
프리랜싱을 하다 보면 디자인을 함께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프로젝트 진행을 동료 개발자와 나눠서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경우에 대금 지급을 늦추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디자이너 분에게 클라이언트에 제공할 시안을 요청할 때도 공짜로 보내달라고 하는 일은 없다. 나는 이것이 자기 시간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프리랜서가 다른 프리랜서에게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공짜로 일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이것은 내가 '공짜로 일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그것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