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누군가는 저지르고 있더라
나는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대학교 시절 이력을 가지고 있다. 1학년 때 처음으로 학내 창업 동아리를 시작해서 부회장을 했었고, 군대 가기 전까지 서울 지역 창업 연합 동아리 임원을 맡아서 대학생 창업 관련 행사를 집행하기도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이 다 그렇듯 꽤나 희망차면서도 어딘가 현실성은 결여되어 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창업하겠다고 모인 대학생들이 창업은 안 하고 어찌 그리 술을 마시는지, 그 술자리를 주도하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업무적으로 큰 소득은 없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스타트업이 요즘처럼 흥하기 전인 그 시절에 창업을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었으니, 대부분은 대기업에 취업을 했지만 지금까지도 특이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A 누나는 무역을 하시던 아버님의 도움으로 학창 시절에 포토샵까지 쓱쓱 해가며 오픈 마켓에 비누를 떼다 팔았다. 그러다 뭔가 인도 팩 카레 같은 것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졸업해서는 컨설팅 회사에 입사를 해서 탄탄대로를 걷는가 하더니, 스페인에 가있던 그 때 퇴사 소식이 들렸고 스타트업 대표가 되시더니, 누구나 들으면 한 번쯤 들어봤을만한 스타트업을 만들고는 돌연 장기 해외 여행을 떠나셨다. B 누나는 대학교 시절 스쿠터를 구매해서 학교 내 스쿠터 대여 사업을 벌였다. 제법 돈이 되더라 이야기를 들었고, 스쿠터 구매가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여름에는 비싸고 반대로 겨울에는 싸서 겨울에 사서 여름에 팔면 시세 차익을 노릴 수 있다는 것도 배웠던 거 같다. 이 누나는 졸업하고 취업 컨설팅 쪽 사업을 진행하는 거 같더니, 최근에는 홍대에 여러 개의 게스트 하우스를 거느린 부동산 거물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C 형은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인턴을 할 뻔 했던 여행 스타트업을 지금까지 10년간 운영하고 있는 불사조 같은 존재다. 가깝지는 않아서 건너서 이야기를 한 번씩 듣지만, 최근에 매출이 증가하면서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해졌다고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D 는 연합 동아리 시절 막내였는데, 갑자기 디자이너로 전향하더니 최근에는 디자인 회사 대표가 되셨다. 어떻게 다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있는 거 같다.
내가 창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학창 시절 "나이로 나의 능력을 제한 받고 싶지 않다."는 강한 소망 때문이었다. 사업을 해야겠다고 어른들에게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우선 대기업에 들어가고, 거기서 실력과 인맥을 쌓아서" 창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싫었고, 대학교 4년, 군대 2년, 회사 생활 몇 년을 하고나면 족히 서른은 되어야 창업을 할 수 있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지금 내가 바로 그 나이가 되었다.
학창 시절의 나를 변호하자면 창업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고 1년 반 후에 입대를 했는데, 입대하기 전 마지막 학기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바로 입대하기 전 마지막 학기를 F 학점 4개와 함께 학고를 받으며, 입대하는 날 휴대폰 문자로 "담당 교수와 면담하지 않으면 수강 신청이 불가능하다."고 연락받은 사람 되시겠다. 무려 이걸 잊고 있다가, 복학 첫 학기에 수강 신청 날 피씨방에서 0학점을 등록하고 수강 정정 기간에 18학점 되는대로 넣은 사람이 바로 나다. 제대하고 나서는 외국어에 빠져서 영어 공부하다 스페인, 브라질을 누볐고, 한참 즐겁게 외국 생활하다 오니 이제 취업을 해야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사실 내가 정말 창업을 도전하지 못했던 것은, '창업'이 '근사한 무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창업에 대한 나의 인상은 엄청난 판단 능력과 어느 부분 빠지지 않는 팔방미인형 창업가가 벌이는 아름다운 한 편의 예술 같은 느낌이었다. 나에게 창업은 매우 우아하고 근사한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 아이템으로나 막 시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창업에 관한 활동을 하지 않은 것보다는 창업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더 낫다
- 창업 동아리 활동 그 자체 보다는 창업 동아리를 했다는 그 사실이 창업가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 창업 동아리를 통해 만든 자기 이미지 보다는 직접 창업을 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간접 체험하는 게 더 나았다
- 그리고 간접 체험보다는 스타트업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는 게 백배 나았다
- 마지막으로 스타트업을 직원으로 다니는 것보다 내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들고 운영해보는 건 비교가 되지 않는 경험이었다
진짜 사업은 결국 고객에 내 서비스(제품)를 보고 웃으면서 지갑을 열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차려입은 정장에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는 건 사업의 성공으로 얻게되는 일부분의 결과이지 결코 전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누구보다 자기가 속해있는 분야에 정통할 수 있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관련 업계 사람들의 이야기와, 무엇보다 내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의 목소리를 진실되게 듣는 것이 정말 사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가장 절실히 깨달은 것은 예전에는 마치 사업의 전부인 것 같았던 서비스(제품)를 '개발'하는 것은 결국 사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다. 아직은 많은 부분이 서툰 초보 사업가지만 내가 쏟은 시간들과 치열함이 모여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것이고, 다시 그 무언가와 함께한 시간들이 나를 제품을 주고 고객의 웃음을 사올 수 있는 사업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대학교 1학년 때 생각하던 "더 이상은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었고, 그와 함께 더이상 아마추어가 용납되지 않는 그 선 어딘가에서 나는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