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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엠미 Aug 06. 2021

<돈키호테>의 메타버스

내가 보는 세상은 진실일까


콘텐츠 대홍수의 시대다. 플랫폼과 콘텐츠 제작 도구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콘텐츠 소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콘텐츠들에 둘러싸여 있게 되었다. 중독이든 애호든 헤비 콘텐츠 유저들이 우후 죽순으로 생겨나는 이 시대에 앞서 약 400년 전에 무시 무시한 헤비 콘텐츠 유저를 그린 소설이 있었다. 소설 <돈키호테>는 당시 (17세기 스페인)에 넘쳐나던 기사도 소설이라는 콘텐츠에 파묻혀 지내다 광기에 휩싸이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다.


헤비 콘텐츠 유저인 돈키호테가 분별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기사도 소설이라는 콘텐츠의 세계에 흠뻑 빠져 현실의 세계와 콘텐츠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돈키호테의 광기는 다시 400년을 뛰어넘어 <메타버스(metaverse. 현실과 가상이 융합된 세계)>라는 개념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인은 400년 전의 광인과 다르게 메타버스와 진짜 현실을 구별할 수 있다지만 약 2500년 전 그리스의 한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플라톤은 <동굴의 우상>이라는 비유로 인간이 보는 세상은 실체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다. 이 세상 자체가 메타버스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인식하는 현실은 동굴 안에 비친 ‘그림자’ 같은 것이고 동굴 밖 ‘실체’를 봐야 한다고 했지만 돈키호테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굳게 믿는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곧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소멸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상세계로 빠져드는 이유를 파헤쳐보면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이 든 시골 귀족인 알론소 키하노는 소설 속 명예롭고 혈기 넘치는 기사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런 욕망이 그를 집어삼켜 분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돈키호테라고 칭하고 명예로운 기사가 되기 위한 무모한 모험을 떠난 것이다.


현실보다 이상을 위해 용감하게 뛰어드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분명 일면 어느 정도 산초처럼 현실적인 것만 생각하고 겁에 질려 당나귀 뒤에 숨어 사는 것 같은 이들에게 즐거움 와 감동과 자극을 준다. 그 고결한 가치는 그대로 두고 이 소설이 두고두고 칭송받는 이유가 여러 면에서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인 만큼 돈키호테의 광기가 죽음 앞에서 사그라들고 현실과 가상세계를 마침내 구별하게 되는 마지막 장이 감동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돈키호테는 패배로 인한 1년간의 칩거 조약을 기사도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집에서 요양한다. 기력마저 점점 쇠해진 돈키호테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닫혀 버리고 만다. 욕망을 억제당한 것이 돈키호테의 메타버스를 깨뜨린 것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지만

보다 더 큰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산초처럼 자신이 믿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별하도록 끊임없이 애써준 주변인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굳건하게 믿었던 세계관을 버리게 되고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전부 인정하며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시했다. 제정신이 들어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됐는지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제정신이 들게 됐는지의 순서는 세르반테스만이 알 것이지만 순서보다 중요한 것은 돈키호테의 좁고 강박적이고 무모한 메타버스가 무너지고 분별력을 갖추자 '둘시네아'라는 열렬히 사랑했던 가상의 여인보다 진짜 자신을 아끼는 주변인들을 돌보는 더 큰 세계가 펼쳐졌다는 점이다.


돈키호테가 자신의 메타버스의 중요한 개념인 명예와 기사도 법칙들을 숭배했듯이 인류 또한 돈, 명예, 권력, 국가, 주식, 비트코인 등 개념화된 무형의 것들을 숭배하고 따른다. 플라톤이 말한 메타버스는 이런 인공 된 세계관으로 가득 차 있는 현실을 얘기하며 그렇기에 현 인류와 분별력을 잃었던 돈키호테는 어느 정도 같은 처지인 것이다.


임종을 앞둔 돈키호테 뒤늦게 자신의 굳게 믿었던 세계가 짜가 아님을 인식하고  바보스러웠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후회한다.  분별력이 돌아온 그는 유언으로 주변인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자신의  크나큰 즐거움이자 삶의 전부가 돼버렸던 기사도 소설 콘텐츠를 경멸하게 된다.


그가 기사도 소설을 경멸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메타버스에 투영된  광적인 욕망이 주변인들을 돌보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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