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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엠미 Aug 13. 2021

인어 공주

깊은 바닷속의 민낯


어둡고 칙칙한 바닷속은 아주 깊다. 그 밑바닥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잔해들이 굴러다니며 구석구석 뒤져봐도 아름다운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죽음의 풍경 같은 그곳에는 놀랍게도 용왕과 신하들이 살고 있다. 피골이 상접한 그들의 모습은 사신도 보고 깜짝 놀랄 정도로 현실 세계를 아득히 이탈한 것처럼 보인다. 바다 바닥에는 육지의 인간은 본 적 없는 다양한 식물종들이 있지만 각종 쓰레기가 올가미처럼 얽혀 있는 줄기와 잎들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죽음의 땅에서 덫에 걸린 채 괴성을 지르는 것 같이 보인다. 바닷속 식물들 사이로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모든 걸 체념한 채 죽은 눈을 하고 헤엄쳐 다닌다.


이런 식물과 물고기가 사는 바닷속 깊은 곳에 용왕이 사는 용궁이 있다. 성벽은 허물어진 지 오래고, 깨진 창문들은 쓰레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든다. 지붕 또한 쓰레기들이 쌓여 오래전에 무너졌으며, 무너진 지붕을 제대로 치우지도 않아 보기만 해도 절망이 느껴졌다. 사방이 뚫린 용궁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초라했다. 그곳에 사는 용왕은 오래전에 아내를 식중독으로 잃고 혼자 살고 있었으며, 용왕의 늙은 어머니가 살림을 돌보았다. 용왕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이 왕족 출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주알 없는 조개껍데기를 꼬리에 6개 달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다녔는데 그런 용왕의 어머니를 모두 다 슬슬 피해 다녔다.


용왕의 어머니가 나이 어린 바다의 공주들에게 주입하는 낙관론은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공주는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그중에서 막내만이 할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막내 공주는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으며 두 눈은 암울한 현실의 이유를 맹렬히 찾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몸에는 언니들처럼 발 대신 물고기의 꼬리가 달려있었다. 공주들은 하루 종일 허름한 용궁 안에 쌓인 쓰레기들을 밖으로 내놓거나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청소를 하고 나면 커다란 깨진 창문과 벽에 뚫린 구멍들로 쓰레기들이 또다시 쉼 없이 들어왔다. 우리가 창문을 열면 미세 먼지가 들어오듯이 말이다. 다시 들어오는 쓰레기들을 봐도 무덤덤해진 공주들은 궁전 바깥에 있는 정원에서 식물들을 옭아맨 쓰레기들을 떼네 주었다. 아무리 떼어내도 끝이 없었다. 식물들은 괴성을 지르듯이 계속 일렁였고 바닥의 모래에는 날카로운 병조각들이 있어 공주들은 조심히 다녀야 했다. 위 쪽을 올려다보면 부끄럽게도 황폐한 풍경을 낱낱이 비추는 하얀빛이 쏟아졌고 바다가 잔잔할 때면 해님을 볼 수 있었는데, 푸른 물결을 통해 보이는 눈부신 해님은 바닷속 온도를 상승시켜 낮은 온도에만 살 수 있는 물고기들을 괴롭혔다.


공주들은 병조각들을 치운 정원 안에 각기 자기 구역이 있어서 흙과 주워온 희귀한 쓰레기들을 이용해 자기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어 놀았다. 푸짐한 음식 모양을 만든 공주가 있는가 하면, 재미있는 쓰레기 괴물 모양을 만든 공주도 있었다. 하지만 막내 공주는 쓰레기를 치우고 흙을 파서 만든 무덤 안에 누워 생각에 잠기는 게 일쑤였다. 언니 공주들은 난파한 배에서 주워 온 희귀한 쓰레기들을 보고 즐거워했지만 막내는 분노했다. 배가 침몰하면 쓰레기는 또 넘쳐나게 된다. 누가 자꾸 쓰레기를 보내는 것일까? 막내 공주는 피가 끓는 분노를 느끼며 이 무덤에 누울 자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막내 공주는 텅 빈 무덤에 막대기를 꽂았다. 얼마 후 바닷속을 흩날리던 찢어진 검정 봉투가 그 막대기에 걸렸다. 깃발처럼 흔들리는 검정 봉투가 승리와 죽음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막내 공주는 바다 위에 있는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공주가 할머니를 조르면 할머니는 전쟁, 벌목, 공장, 폐수 등 인간과 동물 등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마지막엔 늘 '그래도 곧 나아질 거야'라는 말을 꼭 붙였다. 공주는 그중에서 지구 환경오염에 대한 인간의 인식 수준이 흥미로웠다. 자기들이 사는 곳을 오염시키는 짓거리를 한다는 게 이상했는데 바닷속 생물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숲들을 없앤다는 것과 동물들을 가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희들이 열다섯 살이 되면 바다 위로 나가게 된단다.

달빛이 비치는 쓰레기섬 위에 앉아 지나가는 큰 어선들을 볼 수 있지.

중요한 건 환경 단체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히는 거란다."


다음 해가 되면 제일 큰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공주들은 모두 한 살 터울이었기 때문에 막내 공주가 바다에 나가 세상을 보려면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바다 밖으로 나가는 막내 공주의 언니들은 자기가 본 것 중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공주들에게 이야기해 주기로 약속했다. 할머니가 바깥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 것 중에 아름다운 것 하나도 없었지만 참혹한 현실을 벗어나면 뭔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 밖으로 나갈 차례를 제일 손꼽아 기다리는 공주는 막내였다. 막내 공주는 밤마다 깨진 창문에 서서 자신이 만든 무덤 위에 일렁이는 검정 봉투를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무덤엔 쓰레기들이 쌓여갔다.


칠흑 같은 물을 통해 본 달과 별은 수질이 좋지 않아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어쩌다가 그 희미한 빛이 어떤 것에 의해 가려질 때면  공주는 그것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고기를 쓸어 담는 대형 어선에 탄 사람들은 바닷속에서 분노에 가득 찬 인어 공주가 배를 향해 살기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첫째 공주부터 다섯째 공주까지 열다섯 살이 될 때마다 바다 밖을 보고 왔지만 그 누구도 아름다운 것에 대해 얘기하지 못했다. 어떤 공주는 아름다운 것을 봤다고 거짓말을 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애초에 살면서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기에 지어낼 수조차 없어 그만두었다.


'아, 나도 빨리 열다섯 살이 되었으면! 그럼 저 윗 세상에 올라가 쓰레기를 보내는 원흉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시간이 흘러 마침내 막내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자, 이제 너도 다 컸구나. 이리 와라. 언니들처럼 치장을 해야지."


막내 공주는 할머니의 허영이 싫었지만 그동안 돌봐주고 많은 얘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인내심을 발휘해 잠자코 있었다. 할머니는 주워온 철사에 오염을 견디다 못해 잎에서 떨어진 꽃들을 기워 만든 화관을 막내 공주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꽃잎 하나하나 색깔은 빛을 바랐고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또 높은 신분이란 표시로 여덟 개의 큰 진주조개를 공주의 꼬리에 달아주었다. 물론 진주알 없는 빈 껍데기였다.


"도저히 못하겠어요. 당장 떼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참아야지."


'오, 이 부끄러운 치장들을 떼어 버리고 수치스러운 화을 벗어 버리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막내 공주는 차라리 흙탕물을 몸에 뒤집어쓰고 싶었다. 하지만 안쓰러운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드디어 공주는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거품처럼 가볍게 물 위로 떠올랐다. 공주가 물 위로 고개를 내밀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불쾌하게 느껴졌다. 당황한 공주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올라갔다. 바다 밖 세상은 미세 먼지로 인해 뿌옇고 수면 위에는 크고 작은 쓰레기섬들이 즐비했다. 언니들이 암묵적으로 얘기했듯이 아름다운 것은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위에는 커다란 대형 어선이 있었는데, 선원들은 한가했다. 어선에 달린 갈고리 같은 망으로 바닷속 깊은 곳까지 물고기를 쓸어 담는 중이라 그들이 당장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막내 공주는 쓰레기섬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한가로이 갑판 위에서 노닥거리던 선원들은 마시던 병을 바다에 던지거나 오줌을 갈겼고 쓰레기들을 집어던졌다. 던져진 유리병을 본 막내 공주는 어렸을 적 바다 바닥을 거닐다 유리 조각에 찔린 기억이 떠올라 통증이 느껴지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인어 공주는 어선 쪽으로 헤엄쳤다. 어선에는 이 어업 관련 사업들을 총괄하는 굴지의 회사 오너의 외아들이 재미 삼아 탑승하고 있었다. 어업계의 왕자는 술을 잔뜩 퍼마시고 갑판 난간에 기대어 구토를 했다. 가까스로 구토를 피한 막내 공주는 왕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얼큰히 취한 왕자의 벌그레한 얼굴은 참 못나보였다. 왕자는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셨기 때문에 항상 눈은 풀려 있었고 얼굴 빨갰다. 왕자도 인어 공주를 쳐다봤다. 인어 공주는 재빨리 물속으로 숨었다. 왕자의 정신과 몸이 알코올로 인해 제기능을 온전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자는 자신이 방금 본 것을 긴가 민가 하다가 곧 헤벌쭉 웃으며 다시 술을 마시러 갔다.


각종 난잡한 음악이 깜깜한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자는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추태를 부렸다. 인어 공주는 쓰레기섬에서 이 모든 걸 지켜봤다. 인어 공주는 왕자의 추태를 받아주며 비위를 맞춰주는 선원들을 보고 왕자가 윗 세상의 두목이라고 확신하였다. 밤이 깊어 갔고 쓰레기 섬에서 인어 공주는 완전히 술에 취해 속옷만 입고 고릴라 흉내를 내는 왕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록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못 봤지만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어 공주는 쓰레기섬을 떠나지 못하고 왕자를 노려봤다.


그때 웅장한 배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모든 걸 쓸어 담을 갈고리 망을 가동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늘과 바다는 고요했지만 조타실에는 폭풍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술에 만취한 왕자가 들어와 마음대로 키를 돌리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 별일이 없기만을 기도했다. 순간 배가 암초에 크게 부딪히며 기울어졌고 모든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인어 공주는 거대한 쓰레기가 어떻게 바닷속으로 들어오게  되는지 직접 보게 되었다. 인어 공주는 침몰하는 배의 아수라장 속에서 왕자를 찾았다. 그를 반드시 바다 깊은 곳 자신이 만든 무덤에 눕히고 흙을 덮고 싶었다. 하지만 왕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경호원들이 안전하게 구명보트에 태워 바다를 빠져나간 것이었다. 침몰하는 배만 남겨둔 채 곯아떨어진 왕자는 유유히 사라졌다. 인어 공주는 잠시나마 자신이 만든 무덤에 누워있는 왕자를 생각하고 기뻤지만 곧 그가 아수라장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의 물장구를 쳤다.


그날 이후 인어 공주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배가 침몰하던 곳 주위를 찾아가 봤다. 왕자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왕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어딜 봐도 보이는 쓰레기들 때문에 인어 공주의 복수심은 점점 더해갔다. 왕자를 못 만나니 우울해진 공주는 잠을 자지 않는 등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마침내 막내 공주는 혼자서 이 큰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하여 다른 언니들도 알게 되었고, 왕자가 사는 곳을 알고 있는 다른 두 인어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두 인어 역시 배에서 광란의 파티를 하며 술을 들이붓는 왕자를 본 것이다.


“이리 와, 막내야.”


공주들은 막내를 이끌고 왕자의 궁전이 있는 곳으로 솟아올랐다. 온갖 화려한 것들로 이루어진 왕자의 궁전은 말 그대로 으리으리했다. 궁전 앞쪽에는 오션 뷰를 위한 바다가 있었고 공주들은 그곳 한쪽에 있었다. 막내 공주는 마침내 왕자가 있는 곳을 알게 되었고 매일 같이 왕자의 궁전 앞 물가로 가서 밤을 지새웠다. 궁전은 호화로운 것들로 가득했지만 그것들이 바다를 괴롭히고 얻은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인어 공주는 대리석 발코니 아래에 있는 좁은 수로까지 헤엄쳐 가 여전히 술에 취해 있는 왕자를 바라보곤 했다. 인어 공주는 왕자가 전에 갑판 위에서 하던 추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용궁과 그녀의 고향을 그렇게 참혹하게 만든 주범을 다시 보니 공주는 그를 바닷가에서 놓친 것이 한스러웠다.


인어 공주는 점점 더 인간이 싫어졌다. 바닷속을 오염시키는 인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닷속에 귀중한 것을 싹싹 긁어가고 가져간 만큼 쓰레기를 주지 않는가. 그렇게 좋은 것을 가져가고 나쁜 것을 우리에게 버린 그들이 사는 곳조차도 썩 좋지 않아 보인다! 공기는 질이 나쁘고 육지와 숲과 들판 역시 인간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인어 공주는 인간이 도대체 왜 그렇게 미치광이처럼 구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인어 공주는 바다 위 세상을 잘 알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왜 자신들의 터전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데 광적이며 우리 세계까지도 약탈하고 오염시키나요?"

"그들은 우리보다 빨리 죽는단다. 우리는 삼백 년까지도 살 수 있지. 우린 무덤도 없고 물거품으로 변하지만 말이야. 그들은 빨리 죽기 때문에 더 많은 걸 빨리 얻길 원하고 뒷 일은 생각하지 않아. 인간은 또 연약하기 때문에 자격지심이 강하단다.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를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종과 지구를 괴롭히며 빼앗고 안락함을 추구하지. 비록 지금은 정신이 병들었지만 언젠가 그들도 나아질 거야."

"우리는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나요? 맞서 싸우면 안 되나요? 인간이란 종이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멸종시키면 안 되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겠어요."

"그런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단다! 인간처럼 될 순 없어! 우린 인간보다 훨씬 고결하고 선한 존재란다."

"저는 별종인가 봐요. 선한 마음이 안 들어요. 복수하고 싶어요."

인어 공주는 한숨을 쉬며 굳어진 얼굴로 자신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이 꼬리 대신 다리가 있다면 육지로 걸어가 직접 그를….'

"자, 기운 내렴. 우린 삼백 년 동안이나 살 수 있잖니? 기다리다 보면 좋은 날이 오지 않겠니? 좋은 날이 오면

궁중 무도회를 열자꾸나."


할머니가 손녀를 달래며 말했지만 손녀는 전혀 위로받지 못했다. 인어 공주의 복수심은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마음속에는 왕자 생각뿐이었다. 왕자를 납치해서 자신이 만든 무덤에 눕힐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 인어 공주는 깨진 창문으로 용궁을 빠져나와 슬픔에 잠겨 쓰레기들이 함박눈처럼 내려앉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 그때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왕자가 탄 배일 거야. 이 모든 사태의 원흉! 꼭 왕자를 데려올 거야! 내가 만든 무덤에 눕힐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그래, 마녀에게 가보자! 무섭긴 하지만 거사를 치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마녀가 도움이 될지 몰라."


인어 공주는 정원을 빠져나와 사납게 날뛰는 소용돌이로 갔다. 마녀가 사는 곳으로 가는 길에는 기괴하고 온갖 무서운 것들로 가득했지만 별의별 쓰레기들을 다 겪어본 인어 공주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인어 공주를 보자 마녀가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지.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하지만 넌 네 고집대로 할 테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걸. 꼬마 공주님. 그래도 네 물고기 꼬리를 없애고 인간들처럼 걸어 다닐 수 있는 두 개의 다리를 갖고 싶겠지? 그 젊은 왕자를 네가 만든 무덤에 눕히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고 나서 마녀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 나쁘게 큰 소리로 웃어댔다.


"물약을 만들어 줄게. 그걸 가지고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육지로 올라가 마시거라. 그러면 네 꼬리가 줄어들어 인간의 다리로 변할 거야. 날카로운 칼날이 몸을 뚫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걸을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을 참아야 하지. 그래도 괜찮다면 도와주마."

"괜찮아요. 어떤 고통도 참겠어요."


인어 공주는 왕자가 무덤에 눕는 상상을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라. 인간의 몸을 얻으면 다시는 인어가 될 수 없어. 그리고 인간에게 인어였다는 과거를 들키면 물거품이 되고 말아."

"그래도 괜찮아요."


인어 공주는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얘지며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건 결코 쉬운 게 아니지. 복수심으로 왕자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물약을 만들려면 그 값으로 복수심을 내놓아야 해. 네 복수심에 내 피를 섞으면 강력한 힘이 될 거야."

"하지만 복수심을 가져가 버리면 어떻게 복수하죠?"

"복수할 수 없지. 왕자에게 앙심을 품은 이유가 해저 오염 때문 아니야? 인간이 되어서 오염 문제를 해결해. 그게 복수보다 나은 거 아니겠니? 그렇지 않아? 복수심을 가져갈까?"


인어 공주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정했다.


"그렇게 하세요."


마녀는 마법의 물약을 끓이려고 불 위에 솥을 얹었다. 각종 재료와 현란한 방법으로 조리를 하니 솥에서

끔찍한 형상의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드디어 물약이 완성되었다.


"자, 이제 복수심을 다오."


마녀는 인어 공주에게서 복수심을 가져갔다. 이제 인어 공주는 왕자에 대한 복수심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자신이 만든 무덤에 눕는 상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마녀의 집을 나와 숲과 늪을 지나 소용돌이 속을 빠져나온 인어 공주는 용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잠이든 듯 고요했지만 뱃고동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인어 공주는 이제 복수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이제 떠나면 영원히 가족들을 볼 수 없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펐다. 인어 공주는 살그머니 정원으로 들어가 쓰레기들을 하나 둘 치웠다. 그리고는 폐허에 가까운 궁전을 향해 작별 인사를 한 후 검푸른 물 위로 떠올랐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후덥지근했다.


인어 공주는 왕자가 사는 궁전의 사치스러운 대리석 계단으로 다가가 마법의 물약을 마셨다. 날카로운 칼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인어 공주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바다 위로 높이 떠올라 있었다. 고통과 습한 공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인어 공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흐리멍덩한 눈과 안면 홍조를 띤 왕자가 서있지 않은가? 왕자는 풀린 눈으로 인어 공주를 게슴츠레 쳐다보고 술냄새를 풍기며 중얼거렸다.


"낯이 익네…"


인어 공주는 불쾌감을 느끼며 눈앞에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꼬리 대신 두 다리와 발이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벌거벗은 채였다. 인어 공주는 너무 부끄러워 얼른 긴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렸다. 왕자는 공주에게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꼬치꼬치 물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슬픈 표정으로 왕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복수심이 사라진 공주는 왕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고 말을 잘못했다가 인어였다는 걸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침묵한 것이었다. 왕자는 인어 공주를 궁전으로 데리고 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녀의 말처럼

뾰족한 바늘과 날카로운 칼 위를 걷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꾹 참았다. 인어 공주의 어색한 걸음걸이를 본 사람들은 그녀를 수상하게 보았다. 궁전에 도착한 인어 공주에게는 허영스러운 화려한 옷들이 입혀졌다. 할머니가 만든 화관과 빈 조개껍데기 장식처럼 거추장스럽고 수치스러운 느낌만 들었다. 공주는 과거를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인어 공주를 환영하는 파티를 열었다. 실은 매일 열리는 파티였지만 명분이 생기자 왕자는 더욱 흥분했다. 각종 공연과 최고급 요리와 최고급 술들이 널려있었다. 왕자는 역시나 만취했고 다양한 추태를 부렸다. 인어 공주는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 가슴이 메어질 듯 슬펐다.


'아, 왕자에게 복수하려 했었지만 이제는 불쌍한 마음만 드는구나!

바다 오염에 대한 심각성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이번에는 왕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익 관계에 얽혀있는 자들이 재롱잔치를 하듯 막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왕자는 크게 웃었고 공주에게도 춤을 권유하였다. 공주는 모욕감을 느꼈고 인상을 찌푸렸다. 복수심이

사라졌다고 해서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마음이란 것은 원체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다. 왕자는 인어 공주의 그런 차가운 태도에 크게 당황했다. 비록 과체중에 볼품없는 이목구비와 총명하지 못한 정신을 가졌지만 그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왕자는 술기운이 잠시 달아날 정도로 쇼크를 먹어 얼떨결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왕자는 말을 더듬으며 춤을 추지 않아도 되고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고 했다. 인어 공주는 지체 없이 광란의 파티를 뒤로하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왕자는 차가운 태도를 가진 인어 공주에게 마음이 쓰였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보고 웃어주었기 때문에 왕자는 자신을 보고 가끔 인상을 찌푸리는 인어 공주가 당혹스러웠다.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고 그녀를 웃게 하고 싶었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때면 인어 공주는 자신을 매우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자신을 보는 슬픈 눈의 의미가 궁금했고 마치 수수께끼 같았다.


왕자는 술을 조금 줄이고 골똘히 생각을 해보았지만 도무지 자신을 왜 슬픈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고 공주를 즐겁게 할 방법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좋아 죽는 그 어떤 사치품도 공주를 즐겁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기분만 상하게 했다. 인어 공주는 사람들이 파티를 하고 곯아떨어질 때쯤이면 왕자의 궁전 앞 물가로 나와 발을 담그고 저 멀리 둥둥 떠다니는 맥주병을 바라보았다. 물이 일렁이면서 병에 물이 조금씩 찼고 결국 가라앉았다. 병이 당도할 저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용궁이 그리웠다.


어느 날 밤, 인어 공주가 여느 때처럼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물속에서 뭔가 솟아올라왔다. 쓰레기들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보다 물속에서 뭔가 솟아오르니 인어 공주는 의아하게 쳐다봤다. 언니들이었다. 언니들은 인어 공주를 보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는 인어 공주가 떠난 뒤 마침내 쓰레기들이 용궁을 완전히 뒤덮어 이제는 어디든 눕는 곳이 곧 집이 되었다고 모든 곳이 집이라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비참한 현실을 토로했다.


인어 공주는 인간 세상을 파악하며 왕자를 이용해 바다 오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계속 생각했다. 왕자는 인어 공주에게 흠뻑 빠져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다 오염 문제를 같이 해결하자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혹시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나 물거품이 돼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고 불쌍한 인간이에요.'


왕자는 인어 공주가 자신을 지그시 쳐다볼 때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꼭 누군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했다.


".. 아! 내가 언젠가 갑판 난간에서 토를 하다가 어떤 여인이 물속에 있는 것을 봤지

물고기 몸을 하고 말이야... 환상인 줄 알았는데 그 여자가 꼭 당신을 닮았…."


인어 공주는 왕자의 따귀를 때렸다.


"무례하시군요. 제가 생선 같다는 건가요?"

"아, 아니... 난 그저…."


인어 공주는 한번 더 따귀를 때렸다.


"다시는 그런 망언을 하지 마세요."

"아, 알았어.. 미안해.."


인어 공주는 등을 돌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왕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폭력을 당해 정신이 없었지만 등 돌린 인어 공주가 더 신경 쓰였고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을 만큼 후회했다.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긴 인어공주는 생각했다.


'이러다가 정말 물거품이 될지도 몰라. 어쩌면 그 방법으로…. 그럼 나는…. 아니야.  바다 오염을 반드시 해결해야 돼. 언니들과 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비렁뱅이처럼 살게 놔둘 순 없어. 다른 바다 생물들도 그렇게 비참하게 살도록 하지 않겠어.'


얼마 후 왕자의 아버지가 비인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가업을 승계받은 왕자는 더욱더 많은 부를 갖게 되었고 어업계를 직접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인어 공주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왕자에게 말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공주가 부탁을 하자 왕자는 가슴이 벅찼다. 그 어떤 부탁이라도 꼭 들어주고 싶었다. 왕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부탁이 무엇인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인어 공주는 원하는 걸 말했고 왕자는 이유도 묻지 않고 뛸 듯이 신나는 마음으로 인어 공주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곧바로 분주히 움직였다. 왕자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자원과 인맥을 동원하여 인어 공주가 바라는 걸 해주었다. 인어 공주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왕자는 인어 공주의 미소가 감동스러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왕자는 세상이란 퍼즐에 도저히 가질 수 없을 것 같던 마지막 조각을 가지게 된 것처럼 더 바랄게 없이 기뻤다. 인어 공주는 왕자가 마련해준 카메라 앞에 섰다. 화면은 전 세계 모든 방송과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송출되었다.

 

"세상 모든 인간들은 들어주세요."


이란 말을 시작으로 인어 공주는 자신이 살던 곳에 대해 얘기했다. 쓰레기 더미로 인해 무너진 궁전, 죽은 눈을 하고 헤엄치는 물고기들, 쓰레기들이 올가미처럼 얽혀있어 괴성을 지르듯 일렁이는 다양한 식물종들과 먹을 것이 없어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와 바다 생물들.. 오염된 음식을 먹어 식중독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현실이 비참해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된 할머니와 왕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데서나 노숙하는 언니들.. 등등 공주는 자신이 겪고 직접 본 끔찍한 바닷속 풍경을 아주 세세하게 말해주었다.


비록 미치광이처럼 굴 때가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온정이 남아 있는 전 세계 인간들은 인어 공주가 절절하게 묘사한 바다 풍경이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매우 큰 슬픔과 자책을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평소 무뚝뚝하던 사람들도 눈시울이 잔뜩 붉어지는걸 고개를 돌려 애써 감췄지만 곧 대놓고 엉엉 울었다. 너무 큰 죄의식을 느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인어 공주의 정체와 말을 의심했다. 하지만 인어 공주가 자신이 인어였다는 것을 스스로 밝혔기 때문에 그녀의 몸은 서서히 물거품이 되어갔고 모두가 경악을 하며 그 충격적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로 인해 인어 공주의 말을 의심하던 자들까지 끔찍한 해저 이야기를 모두 믿게 되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인류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인어 공주의 호소를 바로 옆에서 본 왕자는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던 현실에서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기분을 느꼈다. 공주는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제발 오염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며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왕자는 발 밑으로 뿌리가 자란 듯 한참을 꼼짝도 못 하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각성하듯 정신이 올바르게 돌아가자 명확한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 그녀는 역시 그때 그 여자였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번에는 슬픔의 눈물이었다. 왕자는 물거품을 바라봤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왕자의 머리와 가슴에 평생 각인되었다.


'인어 공주를 위해 바다 오염 문제를 해결하겠어..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그 이후로 왕자는 더 이상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궁전을 팔고 사치품들을 팔고 모든 재산과 인맥과 대형 어선들을 동원하여 바다 오염을 해결하려고 평생 전심전력을 다해 노력했다. 전 세계인들도 인어 공주의 목숨 바친 호소를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긴 뒤 바다 오염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육지도 돌아보게 되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보니 육지도 해저와 다를 바 없이 충격적으로 참혹했다.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뼈저리게 느낀 인간은 바다와 육지 나눌 것 없이 오염으로 병든 지구 전체의 복구를 모든 일보다 우선시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바닷속 깊은 곳에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맑은 눈을 하고 활기 넘치게 헤엄쳤다.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들을 가진 식물종들이 생동감 넘치게 움직였고 화려하고 위엄 넘치는 용궁엔 수명이 긴 용왕과 그의 어머니가 여전히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해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다섯 자매 공주들에게 말했다.


"이봐라.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했지..? 막내가 오면 궁중 무도회를 열자꾸나.."


다섯 자매들은 각기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이제 더 이상 용궁에는 육지의 어떠한 쓰레기도 없었지만 단 하나 절대로 치우지 않는 것이 있었다. 어떤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는 듯이 바다 깊은 곳 아름다운 해저의 풍경 한 곳에는 검정 봉투가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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