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아톰 Oct 22. 2021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무통 인간의 삶

폭설이 반복되던 날이 끝나고 눈이 녹기 시작했다. 차들이 다시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위는 가장 먼저 눈이 녹았지만, 갓길이나 인도는 여전히 질퍽질퍽한 눈으로 가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휴식을 선택한 기사들이 여전히 많았고, 일을 나온 나는 그만큼 바빠졌다.  



배달에는 피크타임이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의 식사 시간 대에 맞춰 배달 주문이 폭주하는 시간대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점심 11:30-1:30, 저녁 5:00-7:30 까지를 피크타임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피크 타임에 수락한 주문에는 건당 적게는 1000원에서 2000원까지의 인센티브를 붙여주었다. 똑같이 일을 해도 수입은 더 많으니 이 시간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전투적으로 일을 한다.



이미 바쁜 마음으로 일을 하다 보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고 저녁 피크타임이 다가왔다. 그런데 피크타임이 끝나가는 7시 20분에 픽업을 하고 보니 욕심이 생긴다. 29분까지만 배달을 완료한다면 한 건을 바로 수락하여 인센티브를 하나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배달지는 멀지 않은 오피스텔이었다. 조금만 서두르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바쁜 마음에 기름을 붓는다. 서둘러 도착해 오토바이를 세우고 질퍽해진 인도 위 눈을 밟아가며 오피스텔 문 앞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12층을 찍고 닫힘 버튼을 빠르게 반복해서 누른다. 남은 시간은 2분, 12층에 이르러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를 내지른다. 집 호수를 찾아 배달 요청 사항에 맞게 문 앞에 둔다. 신나게 핸드폰을 들어 배달 완료를 누르고 새 주문을 수락하면서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다시 뛴다. 아직 1층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 같은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서. 복도 끝, 코너를 꺾어 돌아선다. 아차, 오늘은 눈이 녹고 있는 날이다. 다른 사람들의 물기 어린 발자국으로 흥건한 복도와, 눈을 묻혀온 내 미끄러운 싸구려 방한화의 콜라보레이션이 일어나 미끄러진다. 대차게 꽈당하고 넘어진다.

아무도 못 봐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조금 아프긴 해도 별일 아니란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일을 하러 갔다.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가량, 넘어지며 코너 벽에 부딪힌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조금 화끈 거리지만 일을 마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무사히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발가락이 부어 있고 만져보니 꽤 아프다.



사실 내가 꽤 아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난 알아주는 무통 인간이다. 일 년 전 투잡을 뛰던 때에 등에 뾰루지가 나고, 허리가 가끔 찌릿했다. 단순 피부염과 좋지 않은 자세 때문인가 싶었고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조금도 호전되지 않는 상황에 10일이 지나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대상포진 진단을 받았다. 10일이나 됐다는 내 말에 의사 선생님은 아프지 않았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불과 육 개월 전 한 일요일, 위경련이 있었지만 약국에서 약을 지어먹으니 괜찮아졌다. 출근을 위해 일어난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 얼굴이 흑색이다. 배엔 가스가 찬 느낌이었으나, 일단 아픈 곳은 없으니 오전에 일을 하고 식사 시간에 근처 내과로 갔다. 증상을 듣더니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하신다. 초음파 기계로 복부를 한참 누르시더니 아프지 않냐 물어보신다. 그냥 그렇다니까 초음파상으론 분명 흔히 맹장염으로 부르는 급성 충수염 같은데, 보통 이 경우 초음파 기계로 누르면 아파서 소리를 지른단다. 초음파상으론 분명해 보이나 내가 너무 안 아파해서 확신은 못하겠으니 의사소견서를 가지고 근처 큰 병원에 바로 가보라 하신다. 2시간 뒤, 난 2차 병원에서 CT 검사를 통해 확진을 받고 수술대에 눕게 됐다.



다시 발가락이 다친 다음 날, 자고 일어났더니 발가락이 괜찮다. 조금 부어있긴 해도 관절을 접지만 않으면 통증은 없다. 그렇지만 이전의 경험에서 온 지혜를 바탕으로, 더군다나 일이 없는 날이었기에 혹시 몰라 집 근처 정형외과로 간다. 부상 경위와 증상을 설명하니 의사 선생님이 발가락을 꾹 눌러본다. 조금 아프다는 내 말에 통증 정도로 보아 인대 쪽 부상인 것 같긴 한데 엑스레이를 찍어보자 하신다.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다시 진료실로 가니 의사 선생님이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신다. 엄지발가락이 T자 모양으로 부러졌다며 대체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냐고 물으신다. 자기가 눌렀을 때 진짜 그 정도밖에 안 아팠냐고 몇 번을 놀라신다. 근데 진짜로 그렇게 안 아팠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은 비단 이 일뿐만 아니라 몸 어딘가에서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 느껴지면 꼭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래도 다행히 젊기도 하고, 인대나 관절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수술보단 깁스를 하고 뼈가 붙는 것을 지켜보자고 하셨다.



반깁스를 감고 병원에서 나왔다. 매니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일을 한동안 못할 것 같다고 전했다. 기간이 짧지는 않을 것 같으니 렌트한 오토바이를 반납하기로 한다. 오토바이를 반납하러 들른 사무실에서 가능하면 산재처리를 하라고 한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잘 몰랐는데, 나처럼 산재 보험에 가입된 일을 하다 다쳐서 산업 재해로 인정될 경우, 치료비 지원뿐만 아니라 일을 못하는 기간 동안 일정 금액의 생활비 지원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절차를 통해 어렵지 않게 산재 보험의 효력을 맛볼 수 있었다. 4대 보험의 위엄을 직접적으로 깨달은 순간이다. 앞으로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4대 보험료를 보며 군말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애인은 반깁스를 하고 나타난 나를 보며 어이없어하며 웃는다. 어제 넘어져 발가락이 아프단 소리에 대충 예상은 했단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일하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며 차라리 조금 쉬라며 잘 됐다고 말한다. 발가락이 부러졌다는데 잘 됐다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이 아이러니한 말이 위로가 되어 같이 웃고 있으니 삶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애초에 인간 또한 불행의 의미를 한껏 뒤로 미뤄 결국엔 액땜이라며 삶을 토닥거리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존재이지 않은가.

연재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시기도  때다. 그러니  글이  책의 마지막이자 시작인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다. 이렇게 삶은 언제나  계획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럭비공 마냥 통통 튀어 나간다. 때로 이런 무력한 순간들이 고통스럽고 괴로워 삶을 원망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울한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위로하는 이들이 곁에 있으니 받아들이는 힘이, 의연하게 대처하는 힘이 차곡차곡 자라난다. 계획과는 다르게 틀어지는 일에 스트레스는 받아도, 단단해진 마음으로 금세 털고 일어나 미소 지을  있게 됐다.



결국 삶에 있어  몫은 그저 다가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다가올 것을 최소화하고 싶어 점점  작게 울타리를 쳐가며 살고 싶진 않다.  삶과 영역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배타적으로,  보수적으로 살아가며 늙고 싶진 않다. 그보단 이렇게 다가오는 것들을 주어진 것이라 인정한 ,  현명하고 좋은 방향으로 반응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먼저 다가서는, 새로운 상황 속에 용기 내어 몸을 던지는 생을 살아보고 싶다.


이전 16화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