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이 된 탈북자 양진우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다.
오현석, 차윤정과 힘을 합쳐서 DMZ 무궁화를 힘들게 완성한 양진우는 3인 중 유일하게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 출신이었다. 지금 눈 앞에서 역사적인 장면인 DMZ 무궁화가 시작되는 장면을 보고 있는 양진우의 머리 속에는 탈북에 성공한 후에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있었다.
우연히 찾아온 국제 컴퓨터 경시대회에 참석하는 기회를 이용해서 자유인이 된 탈북자 양진우는 난민으로서 미국 대학에 들어가서 북한에서 공부했던 컴퓨터 공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언어가 달라도 컴퓨터 공학의 원리는 같았기 때문에 양진우는 븍힌에서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에서도 밤을 새워 가면서 컴퓨터 공학에 빠져 공부할 수 있었다.
로봇 같은 노예 생활을 하던 북한 생활에 익숙한 양진우에게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국 대학교는 낯선 장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양진우는 서서히 자유스러운 미국의 문화에 적응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가 지원해 주는 보조비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해서 양진우는 공부를 하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고생을 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몸은 피곤하고 바빴지만 마음은 북한에 있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고 편안했다.
인권을 억압하고 오로지 체제의 의사에 따라서 노예같이 생활을 해야 했던 북한에 비해서 자유 세계인 미국에서는 무엇을 하든 자유롭게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알아서 선택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체제의 로봇 같이 꽉 쨔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다가 미국에서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처음에는 양진우에게는 많이 낯설었다.
북한에서는 스스로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억압했지만 미국에서는 어떤 것이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양진우의 머리에서는 양진우 자신이 이렇게 세계의 역사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DMZ 무궁화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자율적으로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른 때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인류사를 바꾸는 시작을 알리는 DMZ 무궁화가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양진우는 북한을 탈출한 자신을 난민으로 수용해 준 미국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면서 미국 대학 시절을 계속 회상하고 있었다.
수천 년 인류 역사의 숙제를 풀게 된 DMZ 무궁화를 개발해서 인류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으로 탈북자인 자신의 난민 신청을 받아 준 미국 등 인류에 대한 보답을 어느 정도 한 것 같아 지금 DMZ 무궁화의 시작을 바라보는 양진우의 마음은 뿌듯했다.
탈북자인 양진우 자신을 매몰차게 뿌리치지 않고 품어 준 미국 등 자유 세계에 보답을 한 것에 대해 보람이 느껴졌다.
양진우가 북한을 탈출한 후 미국에서의 자유로운 삶에 적응하는 것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자유인으로서의 삶에 적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알아서 결정하고 개척하는 미국에서의 삶은 양진우에게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고, 양진우는 미국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성적 차석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을 한 후 양진우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를 설립한 후에도 양진우는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때 이상으로 힘들게 고생을 해야 했지만 마음만은 든든했다.
미국에서는 어떤 명령이나 지시를 따르지 않더라도 법 절차에 따르지 않고 불이익을 받을 일이 없었다. 자신이 열심히 일을 하면 그에 합당한 보답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미국이었다.
북한에서는 열심히 일을 해도 그 열매는 모두 인권 탄압을 하는 체제가 가져가고 열심히 일을 한 사람은 도구로서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했다. 말 그대로 북한 주민들은 현대판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곳 미국에서는 열심히 일을 한 개인의 땀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인권을 철저하게 보장해 주는 나라였다.
인간 지옥인 북한과는 180도 다른 미국의 생활 방식에 의해 살다 보니 양진우는 몸은 힘들어도 잠을 부족하게 자도 북한에서의 생활보다 마음이 훨씬 편한 것 같았다.
북한에서 탈북을 한 후 난민 신청을 미국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양진우 자신은 국제 사회의 떠돌이가 될 뻔했는데 미국이 고맙게도 난민 신청을 받아 주어서 이렇게 양진우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회사까지 설립해서 열심히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양진우는 그렇게 자신을 구해 준 미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나중에 성공해서 보답하리라는 마음을 갖고 설립한 회사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다.
미국에서 벤처 회사를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양진우가 설립한 회사가 개발한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경쟁 프로그램보다도 단가는 훨씬 저렴하면서도 품질은 더 우수했기 때문에 양진우가 설립한 회사가 개발한 프로그램은 폭발적인 속도로 매출이 증가했다.
그리고, 곧바로 양진우가 설립한 회사는 미국 주식 시장에 상장될 수 있었다.
미국 주식 시장에 양진우가 설립한 회사가 상장되자 마자 양진우는 미국에서 100번 째 안에 드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북한을 탈출한 후 미국에서 난민 신청을 안 받아 주었으면 떠돌이 신세가 되었을 양진우는 다행스럽게도 미국이 난민 신청을 받아 주어서 지금 이렇게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 100번 째 안에 드는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양진우는 북한을 탈출한 이후 오직 성공만을 바라보고 전력질주하는 삶을 미국에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막상 미국에서 100번 째 안에 드는 큰 부자가 되자 양진우의 가슴에는 큰 공허감이 밀려 왔다. 양진우 자신은 운 좋게 북한을 탈출해서 세계 최대 강국인 미국에서 부자가 되었지만 인간 지옥인 북한에서 인권 탄압을 받으면서 고생을 하고 있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삶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은 벗어난 인간 지옥인 북한에서 아직도 고생하고 있을 수많은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이바지 할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어떤 뾰족한 방법은 떠 오르지 않고 있었다.
북한에서 인간 노예 생활을 하던 것에 비해서 탈북 후 양진우는 세계 최대 강국 미국에서 100번 째 안에 드는 큰 부자가 되어 물질적으로는 더 바랄 것 없이 풍요로와졌지만, 자신이 직접 겪은 북한에서의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구할 방법이 없는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노예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고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찾게 되는 불합리한 일은 더 이상 이 지구상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탈북자로서 미국에서 100번 째 안에 드는 큰 부자가 된 양진우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