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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라 강변 Dec 13. 2020

17 왜 소설이라 생각했을까?

- 시인의 시선, < 죽은 자의 집 청소 >를 읽고

나는 호기심이 왕성한 편이다. 그래서 만화책, 소설, 드라마, 영화 등 좋아하는 작품이라도 웬만해서 두 번 읽거나 보는 법은 거의 잘 없다(반복 학습이 중요한 공부는 예외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수험 공부를 힘겨워한 것 같다. 벼락치기에 능했는데, 방대한 양을 공부해야 하는 시험에 벼락치기는 결코 통하지 않았다. 반복이라는 찐 고행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줄거리를 알게 되면 흥미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성격이기도 하고, 처음에 내 안을 강타한 '느낌'과 '생각'에 집중하고 그래서 그것을 꽤 오랫동안 기억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신선함과 즐거움을 줄 작품들을 찾아 나서는 부지런한 노력을 전투적으로 기울인다.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11월 중순에 여러 권의 책과 함께 구입해 두고 읽지 않았다. 브런치 서핑 중에 작가님의 책 감상평을 읽기도 했지만, 나는 이 책이 막연히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럴 땐 소설이 읽고 싶어 진다. 바닥에 쌓여있는 책 중 <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보통의 책처럼 하드커버의 왼쪽 내지가 아니라, 종이로 된 첫 장에 '김완' 작가 소개가  나와있었다. 작가의 이력이 독특했다. 현재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특수청소 서비스 회사의 대표지만, 대학에서 시를 전공 출판업계 일을 하다가, 전업 작가로 살고자 취재와 집필을 위해 돌연 산골 생활과 일본 생활을 하기도 했단다.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문유석 판사가 '미스 함무라비'라는 법원 소재 소설을 쓴 것처럼, 자신의 직업을 소재로 한 소설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지나 책의 본문에 이르렀을 때 살짝 당황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에세이였다.


그럼, 나는 왜 이 책을 소설이라고 생각했을까?


연회색 빛으로 청소된 방 내부를 그린 '표지그림'과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제목 자체', 그 제목 옆에 '썼다 지운 듯한 흔적',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소설스럽다고 느꼈다.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의 느낌 조차 보통의 일반 에세이 집과는 달랐다. 곳곳에 숨겨진 작가님의 문학적인 문체가 상상력을 더해주어, 이 책은 현실감 있는 소설이나 삶의 해학을 닮은 시 같기도 했다.


나의 취미생활로, 아래와 같은 고운 문장들을 수집했다.




'봄이 간다는 기별도 없이 종적을 감추고 한 걸음 서둘러 여름이 더위를 불러낸 유월이었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집을 치우면서 한 가지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이곳에 남은 자들의 마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았던 사람입니다. 당신이 버리지 못한 신발 상자 안에 남겨진 수많은 편지와 사연을 그 증거로 제출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 죽는 자가 늘어날수록 활기를 띠는 비즈니스. 그 직업적인 아니러니를 떼어 놓고는 이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죄책감이 내가 발을 디디고 선 땅이다.

(중략), 태풍이라도 소환해서 남겨진 발자국을 지우고 싶다. 누구도 묻지 않은 죄를 스스로 지우도록,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나마 용서의 순례 길을 나서야 한다.'




'유아 교육용 전자계산기로 태양계의 신비를 풀어보겠다고 나서는 아인슈타인의 먼 친척에게 기대를 거는 편이 더 낫다. 이렇듯 두뇌가 명석하지 않은 자가 생각이 많으면 삶이 고달파진다.'




'굽이굽이 얽히고설킨 농로와 키 큰 옥수수 밭 사이에 숨어 있는 낮은 지붕의 집을 찾자니 내비게이션도 중언부언하며 부질없이 원점을 맴돌았다.'




'신이 계신다면, 그 남자가 생전에 의지하고 믿었던 신이 어딘가에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그 품으로 불러 단 한 번만 따스하게 안아주실 수는 없는지.

욕실에 벌거벗고 선 채 울고 싶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죄 없는 샤워기만 하릴없이 뜨거운 물을 쏟아내고 있다.'




'자연의 섭리처럼, 청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밤의 장엄함처럼, 모든 왜소한 것이 사라지고 오직 사랑의 기억만이 나를 감싸는 시간이 정말 찾아와 줄까?'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지만, 결국은 남은 자들에 대한 시선과 사유,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에 대한 문학적 통찰을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빠져들어 읽었다.


오늘 나는,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소설을,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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