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참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광수 <무정>에서 시작된 질문

by 박현주

예전에 나는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1900년대 초반에 쓰인 그 당시 배경으로 한 내용임에도 사실적이고 생생했던 이야기 속에서 내가 관찰한 건 '참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발표 제목이 '당신은 참사람입니까?'였다. 책에서는 계속해서 이 사람은 참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도 아니고 하는 말들을 했기 때문에 그때 나의 온 생각은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사람이고 어떻게 하면 참사람이 되는 것인가 였다.


이런 발제를 낸 게 그때 사람들에게 굉장히 호응이 좋았는데 발표 후 여러 차례 질문을 받으면서 말문이 막히게 만든 질문이 하나 있었다. 어떤 친구가 '왜 참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왜 참사람이 되어야 할까? 본능인지 학습된 건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미 왜는 건너뛰고 어떻게와 무엇을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이 질문을 받고 나는 얼렁뚱땅 무슨 말을 하며 얼버무리고 난 뒤에 한참이나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 질문은 꽤 오랫동안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한편에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나 외에는 누구에게도 대답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고민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덜렁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잊히지는 않는 애물단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당시에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비추어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비추어볼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소설 속 인물이 될 수도 있다. 그때는 내가 소설책을 읽는 이유는 나를 비추어볼 대상을 찾아서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굳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비교할 대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 나보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필연적일 것이다. 스스로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나은 대상을 찾게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깨달음이기 때문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부끄러움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자기 합리화와 망각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상황에서 더 나은 사람 (참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 건 미래의 어떤 만족감에 대한 부채를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내가 보는 수준은 이전의 깨달음으로 인해 높아져 있고 자기 합리와 나 망각은 고통을 줄여줄 수는 있어도 지금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습관을 왜 만들기 어려운지에 대해 글을 읽고 고민해보다가 떠올리게 되었는데, 습관도 마찬가지로 더 나은 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서 (깨달음) 현재 익숙하고 편한 것을 선택해 미래의 더 나은 모습 (참사람)을 기회비용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너무 추상적이고, 한마디로는 정리가 잘 안된다.


쓰고 나서 보니 당연한 이야기 같기도 하면서 당연하기까지가 사실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뭔가 더 나은 답이 있으면 좋겠지만 생각이 바뀌기 전까지는 이게 이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이라고 생각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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