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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주 Oct 04. 2020

학생 때 생활비를 벌었던 여러 가지 방법들

작고 소중한 생활비

나는 학교 다닐 때 알바를 많이 하진 않았다. 놀건 다 놀면서도 학업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집에서 용돈을 타서 쓰지도 않았는데, 두 해 먼저 대학을 간 언니가 용돈을 받지않고 영자신문사 활동과 알바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나는 어릴 적부터 언니와 이상한 경쟁을 하면서 커와서 그당시 용돈을 달라고 하는 게 자존심상해서 달라고 하지 못했다. 근데 만약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 꼬박꼬박 용돈 받아서 다녔을 것 같다. (이런  보면 어느 시점의 나도 철이   같지 않다)


내가 용돈을 받지 않고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로 기숙사 비가 엄청나게 쌌기 때문이다. 한 학기에 50만 원도 되지 않았다. 물론 시설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한 학기에 50만 원이면 시설 따지는 게 이상하다 사실. 4인실을 쓰긴 했어도 잠귀가 밝지 않았고, 기숙사는 거의 잠만 자러 가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도 없었다. 생활비는 언니를 보고 따라 들어간 영자신문사에서 기사를 쓰고 원고료를 받으며 근근이 보냈다. 언니는 '돈 벌고 싶으면 너도 들어가 봐'라고 했지만 막상 들어가니 원고료가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알바를 했었다면 충분히 먹고살았겠지만 그래도 잘 생각했단 마음이 들었던 건 육체적 노동보단 무언가를 배워가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면서 신문사 활동을 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고, 졸업한 선배들이 올 때마다 예전에는 사실 더 심했단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여전히 힘들긴 했다. 그때 좋았던 건 매일 저녁 신문사에서 회의가 끝나면 저녁을 신문사비로 시켜먹었는데 덕분에 저녁 비용이 굳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생활비는 모자랐고 살기 위해 무언가 시간이 들지 않는 수입처를 찾아야겠단 생각이 컸다.


그때 교내에서 자잘하게 열리는 상금이 걸린 대회에 지원을 해서 조금씩이지만 돈을 벌었다. (교내 대회는 지나갈 때 보이는 전단지나 학교 홈페이지에 공고가 자주 떴는데 생각보다 인기가 없어서 경쟁력이 있었고 조금 노력하면 높은 확률로 상금을 탈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다. 학교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주식에도 관심이 있어서 성인이 되자마자 증권계좌를 개설하기도 했는데 막상 투자할 목돈이 없어서 하지 못했고 학교 다니면서 하기엔 적합하지도 않았다. (결국 2년 후 휴학을 하고 하긴 했다) 피라미드형 수익 사업 (일명 다단계)에도 잠깐 호기심이 생겼었다. 호기심반 진짜 수익이 있을까 반이었다.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일정량 광고를 보면 수익을 얻는 캐시슬라이드의 PC버전이었는데 내 밑으로 사람을 더 모을수록 그 사람들이 보는 광고수익의 일정량도 나에게 들어오는 형식이었다. 불법적인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상한 광고가 뒤섞여 있긴 했다) 사람을 모으면 작지만 고정수익이 나는 것도 보았고 하는 내내 기분이 찝찝해서 하다가 포기했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국가근로장학생 지원을 한 게 선정이 되어서 한 학기 정도를 버틸 수 있었다.


성적 장학금을 종종 받았다. 꼼꼼하고 완벽한 성격이 아니라 늘 1등은 못했지만 과에서 4등 안에 들면 가장 낮게는 등록금의 1/3까진 장학금이 나왔다. 장학금을 타면 집에 당당히 그만큼은 달라고 요구했다. 그건 내가 번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액만 타도 한 학기 생활금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장학금이 제일 쏠쏠했지만 매번 탈 수 있다고 장담은 하지 못했고 계속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한 번은 타 과의 프로그래밍 수업 조교가 필요하단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그걸로 또 한 학기 정도 쏠쏠하게 용돈벌이를 했다.


휴학하고 돌아와 3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알바를 했다. 이때가 제일 수입이 안정적이었던 것 같다. 학교 앞 서점 알바였다. 항상 서점에서 한 번쯤은 일해보고 싶었는데 운이 좋았다. 파트타임으로 일주일 2-3번 일했다. 첫 알바다 보니 빠릿빠릿하지도 않고 일도 잘 못했던 것 같지만 점장님이 잘 챙겨주셨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무거운 책을 옮긴다던지 바닥 청소며 육체적 노동이 따르기도 했지만 가판대 배치나 재고관리를 할 수 있는 재량권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책을 좋아해서 서점까지 하게 되었다던 점장님에게 책 추천을 많이 받았고 (절대 책이 좋다고 서점 운영하지는 말란 조언과 함께), 학교 서점이라 학기 초가 아니면 그다지 바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카운터에 앉아서 책도 많이 읽었다. 1년 반 정도 있었는데 그 정도면 꽤 오랫동안 일한 거였다. 당시에 같이 일하던 알바가 몇 번 교체되는 동안 계속 일을 해서 그런지 나중엔 나를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알아보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대학원 담당교수님과 처음으로 안면을 튼 것도 서점에서였다. 카페나 다른 서비스직 알바를 하던 친구들은 진상 손님으로 고생하는 이야길 종종 했는데 나는 그런 건 없었기 때문에 사실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일했던 것 같다.


졸업하던 해부턴 아마 알바를 그만두고 다시 고정수입 없이 대내외 대회 상금으로 버텼던 것 같다. 방학에 학교와 연계된 중소기업에 2개월간 인턴십을 하면서 한동안의 생활비를 벌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한 번도 넉넉하게 생활한 적은 없었지만 생활비가 떨어질 시점에 신기하게도 항상 돈을 벌 기회가 있었다.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신기해하시면서도 어디서 내 사주를 봤는지 주변에서 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며 근데 내가 너무 퍼주는 성격이라고 조심하라고 (나는 퍼줄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공감이 되진 않았지만) 했다. 그 이야기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긴 했다. 아마 알게 모르게 도움을 많이 받았을 거란 짐작을 하고 있다. 당연히 모은 돈 하나 없이 졸업했지만 부모님 덕택에 학자금 대출 한번 안 받은 게 어딘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간당간당하게 살아온 기간 덕분인지 졸업하고 처음 스타트 업한다고 수입 없이 보낸 기간이 생각보다 길었는데도 (학교 다닐 때보다 사실 더 빈곤할 때도 있었는데) 잘 버틴 것 같다. 물론 지금 돌아가면 그렇게까지 (미련하게) 안 하고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미 지나왔으니 그냥 좋게 이야기하는 거다.


돌아보면 경제적으론 딱히 계획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구하는 만큼 기회는 열려있다는 믿음을 그때도 지금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막연하게 보낸 것도 있었다. 만약 조금 더 계획하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얼마든지 학교 다니면서도 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이야기의 결론은 사실 없는데 문득 오늘 아침에 예전에 어떻게 살았나 생각을 하나둘 해보다가 나온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각자 학교 다닐 때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회상할 수 있는 기회이거나, 학생이라면 비교대상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사실 다시 돌아가면 미래를 위한 재정적 고민을 당장 돈을 모을 수 없다 해도 구체적으로 해보고, 조금이라도 돈을 모으는 습관을 들여보았으면 좋았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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