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탄에서 알렉시아가 자동차를 사랑하는 행위는 이기적, 회피적 사랑에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자동차는 서운해하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극중에서 알렉시아는 타인의 사랑을 거북해하고 귀찮아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에게서 흔치 않게 보여지는 모습이랄까. 타인의 감정에 대해 책임지기 귀찮고 피하고 싶고, 그러나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니까 실험적 태도로 실행은 해보고 싶고. (알렉시아가 여러 사람과 스킨십, 섹스를 시도 하듯이) 그 태도는 마치 지성을 향한 열망이라도 되듯이 스스로의 내면엔 위장이 된다.
뱅상은 잃어버린 아들을 계속 기다려온 인물이다. 부모의 사랑을 어떻게 알렉시아의 빈약한 영혼에 빗댈 수 있겠느냐만, 어쨋든 알렉시아와 반대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뱅상은 끝까지 헌신적으로 사랑을 해야만 하는 인물로 남아버린다. 알렉시아가 그렇게 끝을 맞이한 것은 영화적으로는 안타까울지라도, 실제 상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그 또한 회피성, 이기성을 가진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랑, 관계라는 것은 지성을 배우듯이 흡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손해를 볼 수 밖에 없고, 귀찮고 때론 인생이 흔들릴 만큼 위험성을 띠기도 한다.
실험적 태도로 상처입은 사랑이 아프다.그러나 그 이기성에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 세계가 가진 본질적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