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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Apr 08. 2022

인간 실격_다자이 오사무

죄의 반의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삶이 괴로울 때만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글이나 영화가 있다. 인생이 온전한 사람에겐 그런 글이나 영화는 추악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이란 영화도 그 축에 낄 수 있을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엄숙함에 못 이긴 자여야만이 백치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백치 짓을 일삼는 것에 쾌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실격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요조의 불안,공포는 세상이 요구하는 실용주의, 그에 따른 부조리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 부조리와 실용주의를 익숙하다고 여기는 자는 요조의 내면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작품에 다가설 수 조차 없다. 작품 초입에서 요조는 육교를 놀이터와 같은 것 으로 생각했는데 알고보니건너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에 실망한다. 그리고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방황하던그는, 자신을 돌보아 주던 넙치라는 대부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현실적이지 못한 꿈은 어른들 특유의 조악함으로부터 기인한 비웃음에 절망되고 만다.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죄’ 라는 것이다. ‘죄’라는 개념으로 작품에서 시까지 쓰였을 정도로 작가는 단순히 요조의 세상을 향한 절망만을 드러내기 보단, 요조와 주변 인물로 ‘죄’ 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중 두드러지는 것이 요조와 호리키의 대화다. 둘은 반의어 찾기 놀이를 하다가 ‘죄’의 반의어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처음에는 죄의 반의어가 ‘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은 ‘악’의 반의어가 아닌가. 그렇다면 법인가. 아니면 ‘신’으로 해두자고 호리키가 멋대로 결론 지어버린다. ‘신’으로 해두면 어떤 개념이 와도 틀림없다고. ‘죄’ 의 개념에 대해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양심과 선의에 벗어나는 행위라고 한다. 그렇다면 죄의 반의어는 양심인가? 선의인가? 사전적인 뜻으로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이 작품에 기반하여 해석해보았을 때, ‘죄’의 반의어는 ‘없다’ 라는 결론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둘의 대화가 이렇게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흘러가 버리고, 우리에게 작가는 그 반의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함으로써 우리 조차도 그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려움을 의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을 소설에 적용해서 해석해보자면 이렇다.

요조는 시즈키란 과부의 딸에게 친아빠처럼 지극히 헌신한다. 딸이 요조를 잘 따르는 듯 했으나 갑자기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한다. “시게코는 진짜 아빠가 필요해.” 여기서 그는 이 어린아이 마저도 나름의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헌신에 큰 절망, 좌절을하고 그 집을 떠난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녔어도 누군가의 헌신을 알아채지 못할만큼, 그 순수함도 잔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도 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요시코. 요시코란 여자는 열일곱의 젊고 귀여운 처녀다. 지금까지 젊은 여자를 만나보지

못 했던 요조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어 둘은 결혼한다. 요시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신뢰의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신뢰의 왕이다. 그래서 요조가 아무리 거짓을 말해도 손사래치며 아니라고 믿어주고, 요조를 늘 걱정해준다. 요조는 이 여자와 함께라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꿈은 또 처절히 부숴지고 만다. 요조를 만족시키는 상징인 만능적 신뢰가 배신을 한 것이다. 그녀는 너무나 무엇이든 신뢰한 나머지 선악 개념이 없어, 외간 남자와 관계를 갖게 된다. 요조는 호리키에 의해 이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먹는다. 그리고 폐인처럼 마약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여기서 시사하는 것이다.


죄에 반대되는 것은 없다.  선악의 개념이 들어서 분별력이 생기든, 극단적으로 순수하던 간에 인간에게 죄라는 것이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이 죄다.


 한 가지 남은 개념이 있다면 ‘신’이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이 ‘신’조차 인간의 죄로 인해 좌절되었음을 시사한다.(종교적 측면이 아니라 철저히 문학적 측면에서의 해석) 그가 쓴 '직소'라는 소설에서 가롯유다가 등장한다. 그는 예수를 겉으론 찬미하고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질투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수를 돈 때문에 팔아 넘기기까지 한다. 여기서 예수야말로 죄의 반대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예수(신)마저 가롯유다라는 악하고 가식적인 인물(호리키,넙치)에 의해 좌절 되고 마는 것이다.


두 소설을 엮어서 볼 때, 요조는 예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대사, 마담도 요조에 대해 하느님처럼 착한 아이였다고 말한다. 예수처럼 헌신

적이고 착한 인물이 인간실격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죄, 그 자체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인간이 죄라고 말해지는 것보다, 이 한편의 소설에서 시사하는 바가 훨씬 나를 설복시키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 불쾌함에 인간실격의 문학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불쾌하게만 느껴지던 글이 비로소 ‘죄’로 가득찬 이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라 느낄 때, 이 소설은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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