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YI NA Feb 25. 2023

김기덕의 영화 뫼비우스(2013)

비평


아버지의 내연녀를 사랑하게 된 아들 이야기


남자가 외도한 지는 꽤 오래된 일이다.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남자의 아내는 매일 술에 절어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들의 얼굴엔 한없이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아들은 아버지가 애인과 카섹스를 즐기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그는 처음 접한 어른들의 세계에 흥분한다. 자기 방으로 가서 그는 자위를 한다. 작품에서 아들이 자위를 하는 이유가 아버지의 섹스 장면 목격 때문임을 대사로서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바로 자위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봐선, 아버지의 섹스에 본인도 몰입되었다는 해석이 작품의 맥락에 적절하다.


여자(남자의 아내)는 이미 이 오랜 외도에 남편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 데다가 섹스 장면까지 목격하니, 더 이상 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자가 저지르려는 짓는 "성기 절단"이 있다.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사랑에 대한 절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서사적으론 질투와 분노 때문이 맞지만, 의미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땐, 이는 남자의 외도가 욕구에만 치중한 사랑이 이었기에 성기 절단이 엄청난 비극을 유발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한 것이다. 실제 서사에서 후에 이 남자는 아들이 자기 대신 봉변을 당한 이후로 애인에 대한 아무런 그리움도 연민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남자의 외도는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이 아니라 첫 도입 부에 갈등 유발의 소재로서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석이 된다.


물론 남자는 애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노라고 말하겠지만, 작품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아들이 그 애인을 사랑할 때와 대비된다. 좋은 레스토랑 가서 같이 밥을 먹고, 섹스를 즐기는 것이 전부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은 아버지의 외도에서 온 비극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의 내연녀 사이에 존재하는 로맨스, 이제 막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이 어른들의 비탄과 공허, 외로움을 겪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여자는 남편의 성기를 자르는 것은 실패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 대신 아들의 성기를 절단하고 만다. 그녀는 왜 아들의 성기를 잘라야 했을까? 외도를 한 건 남편인데 말이다. 그 이유는 이미 여자가 혐오를 느끼는 대상이 비단 남편뿐만이 아니라, '남자'라는 보편적 존재, 그 자체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가 봉변을 당하는 것과 고등학생인 그 청년이 성기가 잘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시작해보지 못한 채 자살을 떠올릴 만큼의 고난을 수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 작품에선 남자의 성기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가장 가까이 닿는, 발기되는 통로이자, 사랑의 결실이자, 뜨거운 광분, 인간을 그 어떤 상투적 존재가 아닌 여자 앞에서 오로지 남자라는 그 자체로 존재해 줄 수 있게 하는 로맨스의 총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남자에겐 오로지 수치심 밖에 생기질 않는다. 이 작품의 훌륭한 점 중 하나는, 성기가 절단당한 인간이 수치심을 겪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면서, 그 가운데에서 로맨스를 느끼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내가 슬펐던 것은 남자의 아들이 여자를 찾아갔을 때의 장면이다. 그녀는 3명의 남자들에게 차례로 윤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남자의 아들에게도 섹스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차마 성기가 없어서 섹스를 못 한다고 할 수 없는 그는 그들이 멀리서 엿보는 사이, 바지를 살짝 내리고 여자의 허벅지 사이에 그 결점을 숨긴 채 섹스를 하는 시늉을 한다. 그 여자 입장에선, 극악의 강간만을 당해야 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섹스는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자(아들)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범죄자들에게서 여자를 지켜줄 무력도 없고, 수치심만은 피하기 위해 시늉을 해야 하는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성기를 절단할 것을 결심한다. 성기이식에 대해 그는 계속 검색해 본다. 그리고 여러 서사가 거친 뒤에 비로소 성기이식이 가능하다는 시점이 찾아오고, 아들은 아버지의 성기를 이식받는다. 그런데 작품은 여기서 함부로 희극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여기서 한 번 더 인간의 정신적 공허가 얼마나 끊임없이 삶에 도사리는지 보여준다.



섹스를 할 수 없었던 아들은 아버지가 알려준 방식대로 몸에 자해를 해가며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방식대로 아버지의 내연녀와 섹스하는 장면도 이 작품에서 아주 인상적이라 할 수 있는데, 여자가 그의 어깨에 칼을 꽂고 그 칼을 비틀면서, 남자는 여자의 가슴을 만지며 서로는 오르가즘에 도달한다. 둘은 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함께 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여기서 이 섹스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정신적 사랑인 것이다. 인간이 사실 가장 큰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서로의 비극이 맞닿을 때이고, 그 순간을 함께 통감하는 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깨에 칼을 꽂는 것처럼 매우 공포스럽고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로맨스의 본질인 것이다.


이 작품에선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이 나름 희극적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극은 다시 비극으로 파멸된다. 아버지의 성기를 물려받고 곧장 아들은 여자에게 달려가 섹스를 하려고 시도하지만, 이상하게 발기가 되지 않는다. 성기가 생겼으니, 어깨에 칼을 꽂을 만한 비탄의 감정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발기가 되지 않으니, 남자는 오히려 성기가 절단되어 고난을 겪을 때 보다 엄청난 외로움과 상처, 공허를 느낀다. 알고 보니 이 성기는 엄마에게만 반응을 했다. 결국 섹스는 엄마와 해야 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실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엇갈림은 남자를 공격한다. 엄마가 아들과 섹스를 계속 시도했기 때문이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 비극에 미쳐버린 아버지와 엄마는 결국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성기를 총으로 쏴서 없애버리고, 스님복을 입은 채 득도한 듯 어둠의 거리에서 불상에 불을 비추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뫼비우스의 띠가 비로소 끊어진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 영화 중에 이 작품에 나는 애착이 간다. 그것은 아들(서영주)이 이 세계의 파국을 받아들일 때의 그 어둡고 공허한 얼굴이 나의 내면으로 하여금, 불현듯 나의 과거를 잊혀 버린 꿈처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 얼굴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강압적인 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