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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 YI NA Jul 31. 2023

강인한 사랑의 서사 이니셰린의 밴시 (2023)

비평


한 노인(콜름)이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고 있다. 바닥은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흩어지고 그는 뼈를 절단한 고통을 감추지 못 한다. 눈을 감고 어두운 세상이 펼쳐지면 곧 죽음이 구름처럼 몰려올 것만 같은 극악의 공포가 몰려온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광적인 짓을 저지르는 가? 그것은 한 젊은이(파우릭)와 절연하고 싶은 의지 때문이다.


 그 노인은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의 고립된 섬에서 우릭이라는 젊은이와 우정을 이어왔다. 그런데 파우릭은 어딘가 많이 모자른 청년이었다. 어휘의 수준이라던지,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다. 한마디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자연속에서만 살아온 순진무구한 백치였다. 파우릭은 콜름에게 2시간 동안 별 의미없는 동물들의 배설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물론 콜름은 그 백치스런 청년을 무척이나 사랑했기에 빠짐없이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노인(콜름)이 절교를 선언한다. 이제 더는 그 쓸모없는 수다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으며, 본래 자신이 하던 일(음악 작곡,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돌변해서 매몰차게 파우릭에게 공격했다. 그 따위 대화들은 역사속에 남지 못 한다고, 본인은 위대한 음악을 작곡해서 길이 길이 남기고 떠나겠다고. 그러나 파우릭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다정함 또한 개개인의 기억에 남는 법이라며 그에게 예전과 같은 우정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미 차가운 맹수처럼 변해버린 노인의 마음은 연약한 파우릭의 영혼을 돌보아줄 뜨거운 감정이 사라진 상태였다.


 절망한 파우릭은 그의 여동생에게 이 사실들을 털어놓는다. 여동생은 오빠 편을 들어주면서 그 노인이 나쁜 것이지, 오빠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며 위로를 해준다. 그런데 사실 한편으론 그의 여동생도 이니셰린에서의 삶에 지쳐있었다. 그는 오빠에게 묻는다.


"오빠는 외로움을 느껴?"


파우릭은 여동생의 질문에 엉뚱한 개소리를 들은 듯한 말을 내뱉는다.


"외로움은 무슨 외로움이야. 콜름(노인)한테나 가봐야 겠어. 어이가 없어서 정말."


그렇다. 이 백치스런 청년이 다른 인물들과 가장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점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동생 말고 다른 남자 서브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한다. 그 인물은 파우릭보다 심한 지진아였다. 그 서브 인물이 파우릭의 여동생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와는 다르게 사색적이고 자기 주관이 확고한 여인이라 오빠보다 더한 멍청한 남자에게 마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니셰린에서의 무료한 삶 때문에 심각해지는 우울증을 참을 수 없었던 여동생은 결국 섬을 벗어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취직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버리자 그 남자 서브 인물은 이 작은 섬에 유일한 사랑을 놓쳐버렸다는 절망감에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만다.


 여동생은 떠나버리고 그나마 말동무였던 서브 인물까지 죽어버린 파우릭은 그래도 그렇게 까지 외롭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 말고도 동물을 무척이나 아꼈기에, 그가 아끼는 당나귀(제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니는 그에게 있어서 영혼의 분신이나 다름 없었다. 제니의 눈망울은 햇살을 받은 검은 호수처럼 맑고 숭고했다. 살면서 단 한번도 탁한 오염물이 번진 적 없는 순수함 그 자체 였다. 제니는 파우릭이 노인한테 절교당해 얻지 못 하는 다정함과 사랑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무언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에, 이 서사는 파우릭에게 깊이 아끼는 반려 동물마저 파멸 시키고 만다. 자신에게 제발 침묵해달라는 콜름(노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거는 바람에 콜름이 남은 손가락을 전부 절단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시체를 보란듯이 파우릭의 집 앞에 던졌는데 제니(당나귀)가 모르고 그것을 먹다가 즉사하고 말았다.


 파우릭은 노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혈연보다 더 뜨거운 존재를 그런 미친 행위로 빼앗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파우릭은 콜름(노인)에게 선포한다. 당신의 그 뚱뚱한 손가락 때문에 제니가 죽었으니, 당신이 집안에 있는 채로 불을 지르겠다고. 시간을 알려주면서 그 시간에 집에 있으라고 금방이라도 죽일 듯 분노했다. 그런데 지금 껏 그 우스운 청년에게 냉정하고 당당히 무시하던 노인의 태도가 변했다. 무기력하고 슬픈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섬의 성직자도 신은 그딴 당나귀의 죽음은 신경쓰지도 않으니 회개할 거리도 안 된다는 말을 했으나 그 노인 혼자 심각했다.


 당나귀마저 사라진 파우릭은 어두운 비애의 그림자에 젖어 슬픈 눈빛으로 혼자 누워 있었다. 그는 남아있는 힘으로 땅을 파서 제니를 묻어주었다. 정신이 허약해진 그는 집안에다가 소, 강아지, 말 등 가축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동물과 감정의 교류를 한다. 나는 너희들이 외로울 것을 알기에 이 섬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집안은 동물들의 털이 날리고 엉망진창인 가운데 파우릭은 세상과 완전히 등을 진채, 그 난장판에 오히려 슬픈 안정감을 느끼며 누워 있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우릭은 노인의 집에 불을 지른다. 집안엔 노인이 담배를 피며 앉아있다. 드넓은 섬의 신선한 공기에  시커먼 매연이 한이 많은 유령의 형상처럼 섞여 가며 집이 타들어간다. 노인은 의연한 표정으로 도망갈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채, 다섯손가락을 자른 것 처럼 이 고통 또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로 의자에 앉아 있는다.


 해가 뜬 다음 날, 파우릭은 노인의 집에 찾아간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리고 다시 맑아진 공기 속에 섬을 비추는 햇살이 바닷가에 투명한 알갱이처럼 일렁인다. 맙소사, 노인은 죽지 않은 채 바닷가에 견고하고 무거운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죽지 않은 것이 서사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적인 마음을 초월한 신의 형상을 닮은 사랑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여동생, 지진아, 제니 등등.. 다른 인물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자신의 외로움이 그토록 참을 수 없이 괴롭기 때문에. 그 노인 또한 외로움과 허무함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했고, 그것을 지켜주지 않는 젊은이의 철없는 미숙함에 복수하고자 손가락을 자르는 광적인 일까지 저질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노인은 파우릭을 사랑했기에 불길에서 살아남아, 마지막 최후의 사랑으로 파우릭의 곁을 지키기를 택한 것이다.


 성직자 앞에서의 회개도 해내지 못 한, 죄로부터의 이 해방이 그를 불길로부터 새롭게 부활시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시 살아나온 노인이 뻔뻔하게 보이겠지만, 마지막에 죽을 줄만 알았던 노인과 막상 다시 조우하니 부끄러운 미소를 짓는 파우릭의 얼굴을 보면, 분노 때문에 잠시 사랑을 망각하는 인간의 과오를 느낄 수 있다.


오랜만에 대단히 훌륭한 작품을 봤다. 5번을 보았다. 이 영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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