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 YI NA Jun 22. 2022

에리히 케스트너 파비안 비평

파비안과 코르넬리아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을 사랑하면서도 생과 심각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것은 죄일는지도 모른다……’


파비안은 그의 연인인 코르넬리아를 옆에 재우고 절망에 빠진다.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후 그는 가난에 대해 생각한다. ‘가난’이란 하나의 나쁜 습관이라고.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아무런 야망없이 살아가는 것은 죄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그는 왜 가난을 습관이라 표현했을까? 습관은 오랫동안 굳어진 행동 방식이다. 그는 가난을 관습적인 것이라 여긴다. 소설 속에서 이상주의자인 파비안은 이것을 타파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그 수단으로서 야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비안은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염세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이렇게 바라본다.


“그는 도미에의 ‘진보’라는 그림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미에는 그 그림에서 차례차례로 기어나오는 달팽이를 그렸었다. 그것이 인간의 발전 속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팽이는 원을 그리며 기어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간사에 있어 가장 큰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에서 파비안은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질 않는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권력 구조가 명확한 상태에서 아무리 돈을 벌고 권력을 가져봤자 자신도 더러워질 뿐이라고 여긴다. 그는 말한다. ‘이상과 권력은 결혼할 수 없다고.’ 특히나 파비안의 시대적 배경은 독일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다. 패전 후에 독일 경제 상황은 극심한 인플레 현상 때문에 더더욱 화폐의 가치가 떨어진 상태였고, 해고가 난무했다. 학문에 열중하던 학생들도 갑자기 군대에 이끌려가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파비안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더욱 더 허무주의로 보여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인간이 허무해질 때, 구원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랑’ 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파비안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법학도인 ‘코르넬리아’란 여자다. 파비안은 이 여자에게 다른 여자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 여자가 학식있고 우아한 여자로 묘사되긴 하지만, 그것보다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기다릴 줄 아는 순애보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랑했던 남자를 오랫동안 잊지 못 했던 아련한 마음도.


  그간 파비안이 봐왔던 여자들은 육체적 욕망에 목말라있었다. 클럽에서 잘생긴 남자들을 차례로 집에 데려와서 섹스하려던 부인, 하숙인들이 나누는 성적 쾌락에 질투를 느끼는 하숙집 주인 아줌마, 그외에 클럽에서 마주쳤던 몸 파는 여자들. 전후 혼란의 이 시기엔 성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광란의 분위기가 난무해서 어디에나 창녀나 남창이 즐비했다. 정상적으로 돈을 벌 수가 없고 그로 인한 빈곤, 사회 불안이 비참한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만난 코르넬리아란 여자는 파비안에게 구원적 존재였을 것이다.


“아까 우리가 포옹했을 때 나는 울었어요. 나는 당신이 좋았기 때문에 울었어요.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일이지 조금도 당신과 관계된 일은 아니에요. 아셨어요? 당신은 언제나 오시고 싶으실 때 오고 가시고 싶으실 때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오시면 나는 기뻐하겠고 당신이 가셔도 나는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하겠어요.”

 “나는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대는 천사와는 사이가 나쁘니까요. 무엇을 시작하시려는 거죠? 우리가 한 남자를 사랑하면 우리는 전부를 그에게 내던집니다. 우리는 전에 있던 모든 것과 헤어지고 그에게로 갑니다. ……(중략)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그에게 선사하면, 그는 저주합니다. 선물은 그를 귀찮게 합니다. ……(중략) 나는 스물다섯 살이고 두 남자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어디에 잊어버리고 놓아두는 우산처럼 버림받았습니다. 너무 솔직해서 부담스럽나요?”

“나는 석 달 동안 그가 우편함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우습지 않으세요?”


코르넬리아를 만난 후 파비안은 자신의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헌신이라면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쉽게 장밋빛으로 끝나버린다면 훌륭한 소설이 아닐 것이다. 파비안은 그녀를 만난 후 거의 바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거기에다 코르넬리아는 갑자기 영화 배우가 되겠다며 다른 남자에게 떠나가려 한다. 그 남자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남자라면서 말이다. 그 남자는 볼품없는 늙은 남자였지만 영화 관계자로서 돈이 많았다. 진실하다 믿었던 한 여자의 사랑도 결국 자본의 힘으로 좌절되고 만다. 그녀는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마치 수술대 위에 놓여져서 의사에게 수술 당하는 기분으로 떠나는 것이라고 자신의 비장함을 편지로 써놓고 간다. 그녀는 욕망의 실현을 위해 떠나는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이것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는 부조리 그대로 인정 해야한다는 발언처럼. 그러나 이것을 당연하다 할지라도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가 쓴 편지 내용 중 이런 것도 있었다. ‘다 같이 묻히는 진흙을 묻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파비안은 이후 우익 신문사에서 취업 제의가 들어오지만 자본의 가치를 잃어버린 그는 자신의 신념과도 맞지 않은 회사에 억지로 취업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며 배회하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아이를 발견한다. 정의감에 아이를 구하기 위해 파비안은 바로 물에 빠져든다. 아이는 스스로 헤엄쳐 가까스로 나오지만 알고보니 수영을 할 줄 몰랐던 파비안은 그대로 익사해버린다.



 에리히 케스트너는 모랄리스트로서 이 소설을 하나의 풍자, 희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랄리스트란 무엇인가. 단순한 도덕가라기 보단 인간의 모순을 말하면서 쓴웃음을 자아내는 사상가다. 순애보적인 사랑을 말했던 코르넬리아는 자신도 그 욕망의 실현에 대한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사랑을 버리고 떠났다. 이것이 그녀의 모순이다. 파비안은 이 세상에 대해 비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면서, 마지막에 아이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수영조차 할 줄 몰라 죽게 된다. 이 세상에 대한 비관적 태도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스스로에 대해서는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이 심각한 상황으로 인해 독자는 허무를 느낄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허무로 끝나서는 안된다. 인간 존재가 가진 모순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사랑이란 것이 삶의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변해버리는 우리들의 안일함에 대해서, 그리고 사상적 고결함만을 추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그 어리석음 때문에 나타나는 비극에 대해서. 인간의 나약함, 모순이 파비안의 허무한 죽음에서 은유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주는 충격인 것이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를 떠올리면서 이 글을 마친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2의 계율이다.


<두 가지 계율(Die zwei Gebote)>


작가의 이전글 영화 온 세상이 하얗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