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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 Sep 10. 2022

끝없음에 관하여 about endlessness

로이 앤더슨 감독 (2019) 단평



인간 세계에서 나의 나약함은 너의 비난이 되기도 하고, 너의 연민이 되기도 하고, 혹은 너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이렇듯 감정과 감정,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고리를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가 아닌, 마치 삶은 이렇게 계속 흘러간다는 듯이 담담하게 보여준다.


1.석양이 지는 하늘 아래, 두 노인, 그리고 새들
영화는 두 노인이 석양이 지는 하늘에 새들이 멀리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벌써 9월이네.' 그 한 마디 대사와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노인의 모습은 인생은 모든 것이 언젠가 지나가버린다는 의미로 보여졌다. 자연,인간,시간 그 어느 것 하나 예외없이 말이다.



2. 계단을 오르는 남자, 그를 무시하는 친구
장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말한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그 친구는 과거에 남자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었고, 화해하지 못한 둘은 그렇게 늙어서도 인사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화해하지 못한 분노의 감정은 어른이 되어서 늙어서도 트라우마로 남아버린다.


3. 무덤 앞에 아들을 떠나보낸 부부
전쟁으로 아들을 떠나보낸 부부는 무덤을 관리하고 꽃을 가져다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우린 네가 자랑스럽다. 죽음을 인정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만 하는 이유, 무덤에 평생 가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현상 앞에서 그렇게나마 위로해야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런 식으로 나약하기에 오히려 죽음 앞에서 희망이 있다는 것.


4. 장댓비가 내리는 날, 딸의 신발끈 묶어주는 아빠
아빠는 우산을 버리고 거센 비를 맞으며 생일 잔치를 가야하는 딸의 신발끈을 묶어주고 있다. 그런데 딸은 그런 희생하는 아버지보다도 신발끈이 잘 묶이고 있는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 사소한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어린이일 때는 자기 자신 밖에 모르지만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고 나면 희생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 인류의 따뜻면서도 영원히 반복될 고리라는 것.



5. 폐허가 된 도시를 떠다니는 두 남녀
나는 실로 이 장면을 영화관에서 보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이 났다. 그만큼 절망적이고, 시적이고, 아름다웠다. 폐허가 되어버린 옛 도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두 남녀를 자세히 보면, 남자가 힘이 없어보이는 여인을 부축해서 어딘가로 데려가는 느낌이 든다. 절망은 거대해서 나약한 인간을 압도해버리지만, 그런 인간에게 한 가지 마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두 사람을 하늘을 날게 해주었고, 두 사람을 끌어안고 어딘가 좀 더 희망적인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부유하게 한다.


6.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혼자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사람
카페안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밖에는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내린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무심하게 앉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노인이 감탄한다. 눈이 너무 아름답지 않냐고. 하지만 무미건조한 현실 속 다수의 인간들은 냉소적인 눈초리로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지닌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인생은 때로 무미건조하다는 것과 그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외치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밖에 보일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


7. 십자가를 들고 매맞는 남자
이 남자는 가톨릭 신부인데, 영화에 여러번 등장한다. 처음엔 꿈을 꾸는데, 자신이 십자가를 들고 가면서 이유없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폭력을 당하면서 올라간다. 그리고 꿈에서 깬 그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간다. 아무래도 자신이 신에 대한 믿음이 깨져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신부는 예배 도중 몰래 포도주를 퍼마시며 오열한다. 신이시여 왜 나를 버린거냐고.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람들 앞에 예배를 하러 나간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사라진 신앙심에 대해서는 정신의학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일관성있게 신을 믿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신일 것이리. 인간의 믿음이란 그토록 나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에 대한 강박증은 스스로 내면에 폭력적 상처를 입힌다.  나약함을 인정하면 자유로워질텐데 그러질 못 하고 강박적 굴레에 빠지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생각이 나는대로 되짚어서 이 글을 썼다. 그리고 나 자신의 부끄러웠던 인생이 이 영화의 쇼트컷처럼 보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부끄럽지 않다. 담담하다. 되려 나의 나약함에서 나는 위로를 받고, 그런 나는 또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위로를 얻고 희망을 얻는다. 인간이 삶에서 만들어낸 이 마법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1214/2021 용산 cgv


이 글을 읽었던 그는 4번에 대한 해석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그건 우리가 가장 받고 싶은 사랑이기도 하고

해주고 싶은 사랑이기도 하기에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없고 자기안에 갇혀있기에

사랑을 한다는 것, 사랑을 해준다는 것 자체는

늘 오류를 범해왔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오직 인간이기에

나는 그 오류마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늘 뜨거운 마음은 몰락을 자처해왔고

그 몰락이 없는 생과 사람에게선

아무런 여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로, 나는 그 서글프고 깊은 고뇌의 흔적을 사랑한다


09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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