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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ke Nov 15. 2019

엄마는 뿔났다(2)

자식을 향한 강한 보호본능

구랑위를 향한 도전은 계속된다. 조식을 먹고 일찌감치 출발하려고 했지만  엄마를 모시고 가는 여행길은 너무 불안하여 검색을 하다 하다 또 늦어지고 만다. 9시 조금 넘어서 셔틀을 타고 다시 여객터미널로 갔다. 


여전히 사람이 많다.


 오늘 못 보면 기회가 없어 어찌 됐든 인파를 뚫고 들어가 보았다.  어머니를 잃어버리면 큰일이다. 우리 어머니는 전화도 없는데.. 그래서 손을 꼭 잡았다. 안쪽을 들어가니 그나마 좀 나았다. 그런데 어디서 표를 사란 말인가..


우리가 아는 터미널을 상상하지 마시라. 

중국의 역이나 터미널의 크기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터미널이 큰 만큼 터미널 안의 창구의 개수도 많다. 한자를 모르니 어디서 표를 끊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런데 그때 반가운 한국말이 들린다. 한국 청년 5명이 근처에 보였다. 여행을 왔나 보다. 너무 반갑다. 난 원래 숫기가 없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하는 주변머리가 없다. 그러나 때가 사람을 만든다고 나는 얼른 표를 어디서 사셨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디 어디서 사고 가격은 구랑위 안의 유적지에 입장료를 내는데 그곳에 가실 거면 세트로 사야 싸다고 묻지도 않은 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고마운 우리 한민족 청년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청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표를 끊고 배가 올 때까지 대기를 하였다. 배를 기다리는 줄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런데 큰 배가 무시로 드나들어 사람은 많지만 예상보다 배를 빨리 탈 수 있었다. 인파에 떠밀려 배에 올라 타자 마자 어머니와 나는 서로 떨어졌다. 그래도 배 안에 있으니 일단 정리되는 데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엄마는 금방 찾았다. 1층 어디에선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계셨다. 나는 사람에 떠밀려 구석으로 밀려났는데 76세인 우리 엄마는 어떻게 인의 장막을 뚫고 자리까지 잡았는지 너무 신기했다. 

배 안의 사람들

 배를 타고 드디어 구랑위에 도착이다. 여객터미널에서 구랑위까지는 보일 정도로 가깝다. 약 15분 걸린다. 구랑위는 작은 섬이나 유럽인들이 중국을 점령할 당시 이곳에 집을 많이 지었다. 그래서 섬 안에 유럽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일광암을 보고 구랑위 이곳저곳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게다가 그 당시 신서유기에서 극찬하던 망고떡을 먹고 싶어 가게를 찾으러 온 사방을 뒤졌으나 끝내 못 찾고 고생만 했다.  지금 엄마의 사진을 보니 무척 힘들어 보이신다. 그때 당시는 난 엄마의 건강과 체력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살아오는 동안 엄마는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 강인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투사셨다.

무척 힘들어 보이신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는 늙으셨고 체력도 많이 떨어졌으며 아픈 곳도 많았다는 것을.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나중에 알았다. 여행 다녀오고 어머니가 한참을 앓아누우셨다는 것을.

 힘들고 몸도 아프고 음식도 맞지 않는 여행에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았다는 것이 지금 사진에서야 보인다. 어머니를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에 어머니만 끌어다 놓았다. 


내가 지쳐 이제 구랑위 섬을 떠나 육지로 가기로 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가는데 역시 거대한 인파가 함께 간다. 구랑위 섬에 그 많은 사람이 들어왔으니 오후에는 똑같이 그 많은 사람이 나가야 한다.


 선착장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선착장 밖에까지 사람이 몰려 대기하는 것이었다. 큰일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뱃시간도 있는데 이 인파를 보자니 오늘 안에 선착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겠다. 나는 기가 질려 얼른 구랑위 내에 호텔을 검색했다. 상황이 오늘은 자고 내일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배를 못 탈 것 같다고 오늘 여기서 자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도 모르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 엄마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뿔난 코뿔소처럼 당당하게 그 인파를 뚫고 앞으로 전진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린 아이기 되었다. 예전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가던 꼬마가 되었다. 

군중의 중간을 뚫기란 어려운 일, 엄마는 본능적으로 군중의 가장자리로 가서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셨다. 내 손을 꼭 붙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중국인들에게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래야 해코지를 안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말로 크게 떠들었다. 

나의 전략이 효과적이었는지 중국인들이 우리가 새치기를 할 때마다 눈을 치켜뜨고 대들듯 하다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뭐라고 욕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그때 정말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왼쪽 사진은 선착장이다. 수많은 인파를 뚥고 선착장에 들어오자 긴장이 풀리셨는지 주저앉으셨다.

 엄마의 힘으로 우리는 간신히 선착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배도 탈 수 있었다. 

중국의 인해전술의 무서움은 끝이 아니었다. 여객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여객터미널에서 호텔까지 가야 하는데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택시를 한꺼번에 잡아대니 우리 차례가 올 수가 없었다. 그곳은 이미 무질서, 혼돈의 카오스였다.


그래서 여객터미널을 벗어나 걸어가기로 했다. 엄마가 앞장선다. 구랑위 선착장부터는 난 엄마한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꼬마에서 못 벗어나 있었다. 엄마를 위해 내가 모시는 여행에서 더 이상 엄마에게 부담을 드릴 순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걱정 마, 걱정 마, 택시 금방 잡힐 거야."하신다.


나는 엄마를 위해 여행을 준비하고 모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담이 많이 컸고 걱정도 많이 했고 정신적으로 힘도 들었다.

엄마는 나를 돌보는 여행이었다. 엄마는 여행 내내 40 넘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막내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여행에 임하셨다는 생각이 나중에서야 들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내가 어떻게 될까 노심초사 걱정하시고 아들에게 짐이 될까 체력을 넘어 정신력으로 따라다니시다 귀국하고 긴장이 풀려 한참 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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