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칠드런 오브 맨(2006)

사라진 희망의 이름

by 이멱여행자

재미 0.8 / 연출 0.8 / 배우 0.7 / 각본 0.9 / 만족도 1.0
총 점 4.2 / 5.0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은지 어언 십여 년이 흐르고, '가장 어린아이'가 분노한 민중에 의해 살해당했다. 자신의 일도 아니고, 자신의 가족도 아닌 한 십 대의 죽음을 온 영국민들이 모두 함께 슬퍼했다. 아이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인류에게 미래가 사라졌다. 더 이상 '사람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아이는 '희망'을 상징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키는 그야말로 희망의 열쇠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물론 영문 이름이 key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 않다). 한 때 반정부 운동가로 활동했던 테오는 2008년 전 세계를 휩쓴 전염병으로 아이를 잃은 후 희망도, 또한 자기 자신도 잃었다. 지금은 단지 한 명의 무기력한 구세대의 상징이 되었을 뿐이다. 정부에서 일하는 그의 친척도 마찬가지. 혼란스러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류의 유산을 수집하지만 그에게 인류의 유산을 미래로 남겨야겠다는 사명의식 따위는 없다.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테러가 일상이 된 지옥도 속에서 살아가는 테오에게도 미래는 없다. 자살을 권장하는 정부가 운영되는 세상 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테오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마치 줄리안이 그에게 사랑과 미래를 전해줬던 것처럼, 줄리안은 또다시 테오에게 미래를 맡긴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아이를 가진 소녀, 미래를 낳을 메시아, 테오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희망의 운반자를 자처한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태어나지 않은 이곳은 아수라, 지옥도. 빛을 잃은 지 수십여 년, 빛을 잊은 인류는 빛을 기억하지 못한다. 실체 없는 미래를 위해 싸움을 목적으로 계속해서 싸운다. 테오는 방법이 없다. 희망을 운반해야 한다.

그가 키와 그녀의 아이를 인류의 희망이라 생각해서 목숨을 다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켜내지 못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을 것. 하지만 그것은 분명 테오도르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작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는 우리들에게 싸움을 멈추라고 울부짖는다. 어른들의 고성과 욕설이 오가고, 총성과 파열음이 난무하는 전쟁 통에서 모두가 들리도록 작은 아이는 있는 힘껏 울부짖는다. 그것은 비단 소녀만의 아이가 아니었고, 테오도르만의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 아이는 모든 인류의 아이였다. 그렇게 절망의 문턱에서 작은 희망의 힘으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테오는 키와 그녀의 아이를 안전한 곳까지 옮기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목적지까지 다다른 그 순간, 구원받은 자는 누구일까. 테오는 그 어떤 아픔과 슬픔도 잊은 듯, 편안한 모습으로 잠든다. 짙은 해무가 가득해 앞을 볼 수 없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던 그들은 마침내 '내일'을 마주한다. 아이의 이름은 딜런이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덩케르크(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