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리를 퇴사하고 진행한 약 40번의 커피챗에는 형석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석님과의 인연은 2015년, 내가 토스에서 퍼포먼스마케터로 일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형석님은 페이스북에 재직중이셨는데, 토스의 어카운트 매니저로서 내부 직원만큼이나 우리 서비스와 마케팅에 관심을 갖고 많은 서포트를 해주셨다.
지그재그로 이직한 이후에도 형석님이 어카운트 매니저가 되어주신 덕분에 페이스북 광고를 중심으로 지그재그의 큰 지표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그재그를 떠난 이후에는 형석님과 업무적으로 협업할 일은 없었지만, 종종 페이스북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고민 상담을 하기도 했다. 느슨한 인연을 이어간 몇 년 동안 나는 이베이와 삼성증권을 거쳐 퍼블리로 이직을 했고, 형석님은 카카오를 거쳐 비브로스 각자대표로 합류를 하셨다.
그러던 2022년 연말,
퍼블리 퇴사 소식을 알린 직후 형석님에게 연락이 왔다.
"저와 같이 일해보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네요" 라며.
형석님은 장문의 메시지로 비브로스의 당시 상황을 진솔하게 설명해주었다.
비브로스는 국내 1위 병원 접수예약앱 '똑닥'을 운영하는 헬스케어 스타트업이다. 2013년에 설립된 이후 누적 300억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으나 이렇다 할 수익모델 없이 투자금을 소진하며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급격하게 서비스 규모가 커지며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적자 폭이 확대됐고, 금리 인상과 투자 불황이 겹치며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태였다.
회사가 버틸 수 있는 런웨이는 그리 길지 않았고 생존을 위해 무조건 돈을 벌어내야만 하는 어려운 시점이었다.
솔직하게- 헬스케어 쪽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기도 했고, 1년 후의 고용안정성조차 담보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형석님의 제안이 그리 긍정적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형석님에 대한 오랜 신뢰가 있었기에 직접 만나서 더 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고 12월의 어느 날, 형석님이 계시는 여의도를 찾았다.
밥을 먹는 내내 퍼블리를 왜 나오게 되었는지, 비브로스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등등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2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쯤 되면 "이러이러한 이유로 지은님이 비브로스에 와줬으면 좋겠어요!" 말을 꺼낼 타이밍이 되었는데 형석님은 내게 입사 제안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뭐지? 답답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형석님, 왜 저한테 입사 제안 안하세요?"
"요즘 커피챗 많이 하면서 더 좋은 오퍼도 많이 받을텐데, 부담을 주고싶지 않았어요."
형석님의 이 말 한마디에서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존중해주는 마음이 느껴졌고, 이런 리더라면 회사가 어떤 상황이건 믿고 따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나 또한 그런 형석님과 함께 일하며 어려운 상황에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형석님과 일해보고 싶어요.
이후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막상 면접을 보고, 오퍼레터까지 받고나니 뒤늦게 여러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연봉도 괜히 좀 아쉬운 거 같고, 회사 상황도 부담스럽고, 조직구조도 마음에 걸리고.. 무엇보다 '비즈니스를 리드하는 마케터'가 되고싶다는 나의 목표를 비브로스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고민 끝에 형석님께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리자, 내 고민을 이해한다며 장문의 회신을 보내주셨다. 긴 메시지 속에서 이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닥 매력적인 상황은 아니겠지만
지금의 비브로스라면 지은님이 마케팅, 기획, 사업, 개발을 한 방향으로 모아
회사가 잘 되게 하는 경험을 어쩌면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게 성과를 내고 나면 그 다음에 뭐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해요.
형석님의 메시지를 보며 Y님과의 커피챗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내 눈으로 봤고
여러 회사에서 비즈니스 성장을 잘 만들었고
내가 배우고싶고 닮고싶은 강점을 갖추고 있고
일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나를 존중해주는
믿을 수 있는 인생의 선배-
이런 사람을 인생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 사람. 사람 하나만 보고 결정해보자.
그렇게 나는 비브로스 합류를 결정했고
2023년 2월 6일, 첫 출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