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별과 달이 자물려 쏟아지는 듯한 책 커버를 들추면 수줍은 듯 해사하게 웃는 작가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밝은 밤」은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주목받은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삶을 관통한 2021년, 저자는 출간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좀 더 다정하게 대하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범람은 응집된 관계의 거리를 성기게 벌려 놓았다. 비대면의 시대, 타의적인 거리두기는 자기자신을 대면할 기회를 제공했다. 바야흐로‘자기 이해’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밝은 밤」은 모녀 4대를 꿰뚫고 통과한 100년의 시간 동안 ‘자기 이해’를 그림자 속에 꽁꽁 숨겨둔 여자들의 이야기다. 백 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환멸 나는 여자들의 ‘자기 인내’가 340쪽의 책 속에 응축되어 있다. 완고하게 쌓아 올린 그림자의 탑을 작가는 부드럽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어둠으로 상징되는 밤을 ‘밝은’ 것으로 수식한 이유가 무엇일까 자못 궁금하다.
희령. 열 살의 지연에게 할머니와 보낸 희령에서의 열흘은 여름 냄새로 기억된다. 서른두 살이 되어 다시 찾은 희령은 폭설이 퍼붓는 한겨울이다. 잠을 이어 자지 못해 바다를 물들이는 해의 일주를 고스란히 지켜보는 지연에게 희령의 적요함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싫지만 사람이 간절하다. 손 닿는 곳에 ‘내 편’이 있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엄마도, 아빠도, 바람을 피우고 사과조차 하지 않은 남편도 아니었다. ‘때려도 꼬리를 흔들고 복종하는 개’처럼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며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려던 지연은 남편과 이혼 후 부모의 책망을 피해 희령으로 왔다.
자신의 존재를 면면히 증명해야 했던 지연이 천문 연구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구 밖 무한한 우주의 세계를 알았을 때 지연은 비로소 위안을 느꼈다. 우주의 관점에서 먼지처럼 작고 유한한 자신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 당연했고, 무리 지은 듯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실제로는 혼자이며,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모든 물질들은 서로에게서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스스로가 별의 먼지 같이 고독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 고독을 인내하며 삶의 과제를 부단히 수행하는 것. 그것이 혼자 살아남은 딸로서, 남편에게 배신당한 여자로서 지연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었다.
도망치듯 내려온 희령에서 지연은 열 살 이후 보지 못했던 할머니와 재회한다. 오랜 공백의 어색함은 지연과 닮았다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로 메워진다. 고요한 희령이 품은 이야기는 실로 광막하다. 할머니의 입을 통해 펼쳐지는 증조모 이야기는 지연까지 이어져 내려온 모녀 4대의 지난한 ‘인내’의 역사였다. 일제 강점기, 황해도 삼천에서 백정의 딸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의 것들이 허락되지 않았던 증조모, 이정선. 호기심이 많고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여 양민 남자에게 무람없이 말을 걸던 정선. 증조할아버지, 박희수는 그녀의 무람없는 생기에 반해 부모를 거스르고 일제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 그녀를 데리고 개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개성에서 잠시 만끽한 환대는 노환 중인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다는 죄책감과 백정의 딸이라는 원죄가 자물려 정선을 실낙원으로 몰아갔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인의 지고지순한 명분을 몸소 실천한 증조부 역시 먹고사는 일과 인이 박힌 수직적인 남녀관계 앞에서는 쩨쩨해질 뿐이었다. 그리하여 정선은 피가 밴 버선발에 기대를 묻었다. 그때 정선은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증조모가 떠난 고향에서 노모의 임종을 지켜준 증조부의 친구 새비 아저씨와 그의 부인이 일제의 수탈에 쫓겨 개성으로 왔다. 어린 시절 돌멩이를 친구 삼아 말을 건네던 정선에게도 비로소 친구가 생겼다. 고향 지명으로 서로를 부르며 정선은 ‘삼천’이 되었고, 삼천과 새비는 소용돌이치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나간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피난까지 이어지는 수난의 역사에서 삼천과 새비는 휘몰아치는 태풍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돈을 벌러 간 일본에서 새비 아저씨는 원폭에 피폭되고 후유증으로 끝내 죽고 만다. 남편을 잃고 어린 딸, 희자를 데리고 혈혈단신으로 대구까지 가야 하는 새비를 도울 힘이 삼천에게는 없다. 해방 후 불어닥친 사상의 피바람을 덮어쓰지 않기 위해 눈앞에서 이웃이 총살을 당해도 표정을 감춰야 했고, 살을 에는 피난길에서 어린아이가 도움을 청해도 매몰차게 뿌리쳐야 했다. 삼천에게 삶이란 오직 살아남기 위한 고행일 뿐이었다.
질곡의 역사는 지연의 할머니인 영옥의 마음에도 같은 병을 심었다. 백정의 자식이란 굴레에 갇힌 어머니와 양민의 씨를 물려준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아버지. 무기력한 존재에 대한 속박은 해방과 피난을 겪으며 더욱 견고해졌다. ‘아무것도 아닌 나’라는 굴레에 스스로를 졸라매고 아버지가 붙여주는 아무 남자와 결혼을 한다.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귀애하던 새비 아저씨를, 어린 시절 영옥이 크게 웃고 공을 차면 아버지는 화를 냈지만 그 모습을 칭찬해주던 해 같은 새비 아저씨를 기억하면서도 가시밭길을 선택한다. 다른 길은 결코 없다는 듯이. 대를 이은 체념의 삶은 결과마저 잇닿았다. 이북에 부인이 있음을 숨기고 영옥과 중혼을 했던 남편, 길남선은 시혜를 베풀 듯 딸인 미선을 본인의 호적에 올리고 떠나버렸다. 무던한 삶을 갈구했지만 시대의 굴레는 영옥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실관계와 다른 호적,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굴레는 지연의 엄마인 미선마저 옭아맸다. 홀로된 영옥이 먹고사느라 바쁜 모습을 보며 미선은 양순한 아이로 성장해야 했다. 정상 가정에 대한 희구는 시가의 모진 타박을 부절히 인내하는 것으로 완성해야 했다. 큰 딸을 잃고 영옥과의 관계마저 끊어진 미선은 지연에 대한 기대를 삶의 동력으로 삼았다. 평범의 동그라미 안에 어떻게든 안착하려는 미선의 갈망은 지연으로 하여금 인내의 그물에 빠지게 했다. 모녀 4대를 관통하는 인내의 올가미는 백 년의 시간을 올올이 품으며 새끼를 꼬았다.
「밝은 밤」을 읽으면서 지난 백 년 동안 이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백 년의 시간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생기 어린 본모습을 그림자 속에 묻고 삶을 견뎌야만 했던 여자들. 시지프스의 형벌을 삶으로 구현하는 듯하다. 피 밴 버선발에 기대를 묻는 삼천을 보며 동시대를 살았을 내 증조할머니를 생각한다. 장날 시내 버스정류장에서 증조할머니와 마주쳤을 때, 나를 몰라볼 것이라 생각했던 증조할머니가 스스럼없이 옥색 스란치마를 걷어올리고 고쟁이 속 주머니에서 천 원을 꺼내 쥐여 주던 것을 기억한다. 어린 지연이 부리는 재롱에 웃음 짓던 삼천을 보며 다락 깊숙이 넣어둔 떡 뻥튀기를 꺼내어놓던 내 증조할머니를 떠올린다. 고기 반찬을 혼자 집어먹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영옥을 보며 나의 대학교 입학 소식에 여자가 왜 기술을 안 배우고 학교에 가냐고 의아해하던 내 할머니를 회상한다. 초경이 터져 다리 사이가 얼어붙어도 피난길을 군말없이 걸어야 했고, 바느질로 홀로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영옥을 보며 내 할머니의 출생연도가 1934년임을, ‘오카상, 오바상, 오하요우 고자이마스’를 술술 말하지만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던 내 할머니를 떠올린다. 깡 말라가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벌어 희자를 공부시키는 새비 아주머니를 보며 배달하는 학습지를 내게 들이밀던 내 엄마를 돌이켜본다. 끊임없이 돌을 굴려 산 위를 올라가는 시지프스의 형벌이 내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에게 내려진 것 같다.
광막한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이 어째서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일까? 작가의 표현대로 어째서 ‘참나무나 기러기가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일까? 별의 먼지가 어떤 배열을 겪어 인간이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떤 삶을 살든 종국에는 별의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는 동안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일 수는 없을까.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면 삿된 것일까. 삼천은 새비에게 화가 나는 것을 서럽다는 말로 바꾸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녀들에게도 분명 밝은 그림자가 존재했다. 백정의 자식이란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던 어린 삼천이, 크게 웃고 공을 잘 차고 시인 같이 말하던 어린 영옥이, 희령의 바닷가에서 할머니들에게 둘러싸여 무람없이 즐거워하던 어린 지연이 가졌던 밝은 그림자. 인내의 파도에 휩쓸리며 풍화된 밝은 그림자를 찾아주고 싶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 희령은 어쩌면 그녀들이 잃어버린 밝은(熙) 그림자(影)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끝 간 데 없이 돌을 굴리던 시지프스에게도 산의 정상에서 돌을 던지기 직전, 숨 돌릴 틈이 있었을 것이다. 고단한 삶을 굴리던 삼천에게 새비가 있었듯이, 영옥에게 희자가 있었듯이, 미선에게 명희가 있었듯이, 지연에게 지우와 언니 정연이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듯이. 지연은 별의 먼지로 돌아간 이후에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기억하고 싶다. 이 땅에 살았던 인내의 여자들을, 그 이름들을 희령(熙影)이라는 밝은 그림자로 끄집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