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일부분을 떼어내는 일
어떤 사람이 되었든 사람을 잊겠단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삶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면 잊어야지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테니.
살면서 사랑했던 사람이었든 혹은 그냥 친구였든 잊어야지 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 사람은 내가 많이. 아주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상처를 준 사람은 언제든, 어느 순간.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 연락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잊느라 그렇게 애썼던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그 연락을 받을 수 없다.
잔인한 현실이다.
자신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 연락이 온 경우라면 어떨까.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애써 잊은 그 상처가 되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의 비겁함을 떠올리기 싫기 때문에 연락을 받지 않는다.
어느 것이 더 아플까.
타인이 되어버린 사람이 준 상처와
스스로 낸 상처의 차이.
일반적인 인지상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나 저러나 아픔의 정도는 비슷하다.
버려졌거나
버렸거나
그런 정도의 표현을 할 정도의 사이라면
정말 가까웠던 사람일테니.
어쩌면
나의 행복이나 편의를 위해 상대를 버린 사람이
그 아픔을 견디기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음을 줬던 상대를 버리는 것 역시 아픈일이다.
하지만 탓할 상대는 오로지 자신 밖엔 없다.
상대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빨리 그 아픔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저. 더럽게 운이 없을 뿐이었다고.
스스로를 탓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은
자기 속을 파먹는다.
비겁한 인간 병신같은 인간 더러운 인간..
스스로를 자학하면서.
상대의 존재로
내 삶이 비참하다면
그럼에도 그 사람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 사람의 존재로 행복하지 않은 나의 곁에 그 사람을 두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일일까.
너도 그리고 나도
함께 침몰하는 일인게 뻔한데...
산다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일은 삶을 지속해야하는 절대적 의무를 진 생명체의 프로그램엔 들어있지 않다.
몸이 살기위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고
마음이 살기위해서
다른 이에게 아픔을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고나면
나는 살아갈 가치를 잃을테니.
그렇기에
마음을 준다는 일은
생명을 건 도박이 된다.
내가 살기 위해 버렸으나
그로인해 살기위한 자존감을 잃는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배워 아는 우리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너무도 무서운 일이 되고 만다.
상처를 주지도
상처를 받지도 않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의 필요충분 조건이 되고만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는다.
의미를 잃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어떤이는
그것을
삶의 숭고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숭고? 지랄염병하네.
ps.
버리고도 죄책감 없는
사이코패스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니
신경쓰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