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브런치 글을 읽다 혼자 깔깔 웃었다. 사실 글 쓴 작가님의 포인트는 웃음이 아니었지만, 20여 년 전 내 흑역사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 어떤 흑역사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방울방울 되는 바, 나도 한 때 도를 아시냐는 질문을 꽤나 많이 받았다.
아직 어리바리했던 스무살 겨울, 동아리 친구들과 만난 후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크리스마스다 보니 지하철 안에는 사람이 그득하고 시끌벅쩍했다. 맥주 두어 잔에 볼이 발그레해진 나는, 크리스마스 흥취에 젖은 채 지하철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여자 두 명이 말을 걸었다.
“어디 좋은 데 갔다 오시나 봐요. 인상이 너무 좋아요.”
“그러게, 인상이 너무 좋으시다. 얼굴에 아주 복이 가득해요.”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다다다 말을 걸어 당황했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던 중, 한 여자가 말했다.
“근데 집에 걱정거리 하나 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걱정거리 하나 없는 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요상한 일이지만, 당시엔 귀가 솔깃했다. 그즈음 엄마아빠 사이가 폭풍전야였고 나는 그 사이에서 괴로울 때가 많았다.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았던 어린 내 마음에는 부모님의 불화가 엄청난 굴곡이고 지상 최대의 난제로 느껴졌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우울해진 내 얼굴을 본 두 여성들은, 간곡히 위로하며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그곳은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들락거리던 번화가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주 가던 동네라도 낯선 사람과 낯선 장소에 가는 게 찜찜하긴 했지만, 술을 먹어서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순순하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들어가 보니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몇 사람이 나와 반겨주었다. 곧 나는 그들이 말했던 ‘나를 도와줄 사람’ 앞에 앉았다. 흡사 도사의 풍모를 풍기던 그 남자는 점잖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는 내 생년월일을 받아 적은 후, 역시 나를 데려온 사람들의 말대로 나야말로 우리 집안을 살릴 유일한 귀인이라고 했다. 나만이 우리 집에 깃든 모든 액운을 몰아낼 수 있고, 오늘 여기서 그 모든 일을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였다. 희안한 논리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우리 집의 모든 액운을 물리칠 방법은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조상님들께 예를 다하는 것이었다. 예를 다하는 방법은 이미 차려진 제사상에 내 성의를 표하고 열심히 절을 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호주머니에는 겨우 집에 돌아갈 차비 정도만 남아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돈을 다 써버려서 이거밖에 없는데.. 이것도 있다 집에 갈 때 차비로 써야 해서 어쩌죠”
죄인이 된 마음으로 내 처지를 설명하자 도사는 아주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차비는 우리가 해결할 테니 일단 본인이 가진 돈을 남김없이 내서 성의만 표시하시면 됩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지인짜 얼마 없는 돈을 꺼내놓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제사상이 차려져 있는 방은 너댓개의 촛불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긴가민가했던 마음이 두려움으로 변하자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해치우고 돌아가자는 생각에 할 수 있는 한 빨리 절을 마치고 그 도사 같은 남자 앞에 다시 앉았다.
그는 핼쑥해진 내 얼굴을 보고 나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덤도 주었다. 조상님들이 나의 정성에 아주 흡족해했으며 이제 나에겐 4명의 수호신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그 수호신은 교통사고와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테니 복도 그런 복이 없다고... 탄생설화도 아니고 수호신이라니..속으로는 으잉? 했지만 겉으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한 달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얼른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여자와 함께 그곳을 빠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자 감옥을 빠져나온 듯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주며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꼭 다시 만나자 했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안도감과 차비까지 챙겨준 그녀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 타자 내가 방금 겪은 일이 마치 꿈인 듯 낯설게 느껴졌다. 귀인? 조상님? 수호신? 누가 봐도 소설인데 내가 뭐에 홀린건가? 모르는 사람을 무턱대고 따라가다니 겁없는 녀석. 아이고 미치지 않고서야.
버스에서 내리자 절을 많이 한 탓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그리고 한 달간 비밀에 묻혀있어야 할 이야기는 곧바로 이 친구 저 친구에게로 전해졌다. 내 가슴속에만 담아두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였다. 며칠 후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등짝도 맞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나는 내 흑역사 덕분에 가끔 거들먹거릴 수 있게 되었다.
"너네 수호신 있어? 나는 수호신이 4명이나 있는 여자야!!"
아이들이 침대에 누워 재밌는 얘기 해달라고 조를 때도 또 한 번 써먹었다.
"이러저러해서 엄마는 수호신이 4영이나 생겼어. 멋지지? 엄마는 불사조야!"
지금은 웃자고 했던 그 말이 씨가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