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써지는 날
외로운 날엔 글이 더 잘 써진다.
여기서 ‘잘’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거나 문학적으로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술술 잘 나온다는 얘기다.
시시때때로 외롭고 억울한 순간들이 있다. 그런 마음을 내보이면 자칫 못나 보일 까봐 나 때문에 다른 사람도 같이 외로워질 까봐 그들이 상처 받을 까봐 그것도 아니면 너는 내 이야길 들을 자격이 없어 하는 억하심정으로 차라리 내 마음 속 깊숙이 숨겨 놓는 편을 택한다. 그러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따금씩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로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가 생기며 엄청난 균열이 일어난다. 마음 속엔 폭풍우가 일고 외로움이 사무친다. 이런 날은 눕기 전 아무리 피곤하고 졸렸다 한들 불면의 밤이 되기 십상이다. 내 마음 속 폭풍우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기인한 거라면 내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에 몸서리가 쳐진다. 난 정말 혼자구나 하는 생각애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 앉는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저 혼자 누워 슬퍼하고 외로워 하다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나쁜 기억까지 소환해 나를 더 괴롭히는 것 밖에는…그러다 정말 참을 수 없으면 조용히 나가 책장을 펼친다. 일종의 도피인 셈이다. 글자마저 들어오지 않을 때는 다시 노트를 편다. 이런 날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은 원망과 회환, 저주 밖에 없을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 뭐라도 쓰기 시작하면 내 감정은 땅 밑에 감춰진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튀어 나온다. 크든 작든 상처받은 뭉탱이들이 땅 위에 패대기 쳐진다. 신기한 건 정신없이 고구마 줄기들을 들어 올리다 보면 퍼뜩 정신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또다른 내가 튀어 나와 멀찌감치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속사포처럼 쏟아낸 나의 격렬한 감정들이 어느덧 조금씩 진정되고 사그러짐을 느낀다.
꺼내놓고 보니 순도 100프로 슬픔과 억울함과 외로움인 줄 알았던 내 감정들이 내 것이 아닌 듯 보일 때도 있다. 그 정도로 외롭고 슬플 일은 아닌데. 나만 아니라 너도 억울할텐데...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건지 쓰다 보니 조금 더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화학작용은 다시 날 조금은 편히 숨쉬게 한다. 거친 땅속에 손을 뻗으면 달큰한 고구마가 딸려 나와 수확의 기쁨을 알려주는 것처럼, 나도 가끔은 그런 행운을 맛보는 것이다.
보낼 수 없는 편지라도 분명 누군가를 향한 말이듯, 외로운 날의 쓰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듯해서 따뜻했다.그래서 나는 계속 쓰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