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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돕 Apr 19. 2024

놀이로써의 글쓰기.
즐거운 마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씻고 나오니 둘째 아이가 안방 침대에 떡하니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다. 딱 내가 누워 자는 그 자리다.


엄마의 하얀 베개를 쿠션처럼 세워 기대앉아서는 이불을 허리춤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나머지 베개 하나는 허벅지 위에 올리고 그 베개 위에 다시 책을 얹어 들고 집중하는 모습이 꼬물꼬물 귀엽다.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난다. 그동안 침대에서 내가 자주 취하던 자세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녀와 똑같은 모습으로 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투닥거리는 때가 많았다.


거실에도 6인용 식탁이 있고 작은 방엔 아이 책상도 있지만 푹신하고 포근한 안방이 내겐 그 어느 서재 못지않게 좋았다. 원체 몸이 차기도 했지만 치료 후 수시로 한기가 돌고 금세 피로해져 툭하면 누워 있어야 하는 내 처지에 침대는 안성맞춤이었다. 아이에게도 그런 내 모습이 편해 보였나 보다.


하지만 이제 컨디션도 조금 나아지고 날도 따뜻해져 나는 요 며칠 침대 대신 식탁 앞에 자주 앉았다. 침대처럼 포근하진 않지만, 베란다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나무까지 볼 수 있어 좋았다.


더 좋은 건 쓰면서 뭘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머그컵에 그날그날 먹고 싶은 티백을 하나 넣고 뜨겁게 끓인 물로 우린다. 뭘 쓸지 몰라서, 안 써져서, 답답해서 한 번씩 홀짝 거리다 보면 큰 잔이 금세 비워진다.


때때로 군것질거리를 찾아오기도 한다. 달달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 먹다 보면 마구 피곤하고 졸음이 쏟아지다 가도 반짝 정신이 들어 다시 쓸 힘이 난다. 침대에 있었음 별 저항 없이 스르륵 쓰러져 시간을 날려 먹었을 텐데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거실 식탁에서는 수시로 엄마를 불러대는 아이들이 복병이 된다. 굳이 엄마를 찾지 않아도 아이들이 돌아다니면 내가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분주해진다. 그렇지만 또 나름 엄마가 뭔가를 열심히 읽고 쓰는 걸 보여줄 수 있으니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흐린 눈을 할 때도 있다.


엄마의 '열심'이 밥이 되고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도 어쩌면 느낄 것이다. 엄마가 뭔가에 집중하고 애쓰는 듯하다가 시원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덮으면 그전보다 훨씬 행복해 보인다는 것을. 그럴 때의 엄마는 평소보다 조금 더 넉넉하고 너그러울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수시로 자기랑 놀아 달라던 둘째도 엄마가 작은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잘 기다려 준다. 이번엔 침대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아 낄낄대며 좋아하는 만화책을 다. 중간중간 재밌는 장면이 나오면 심봤다는 듯 나한테도 읽어 보라고 책을 펼쳐 보인다.


이런 순간 나는 내가 정말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비장한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냥 즐거워서 하는 일, 너희들과 함께 부대끼며 할 수 있는 일. 그런 때는 정말 즐겁다.


동시에 나의 이러한 순수한 열정과 욕망이 부디 쉽사리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하는 놀이 중에 나를 이렇게 가슴 뛰게 하고 충만하게 한 것은 없었으니까. 물론 이렇게 괴롭고 힘들고 어려운 것도 없긴 했다.


행복이 뭐 별 건가, 그냥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 보내고, 봄이면 꽃 보고 이런 거지 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행복이자 행운이라 여겼던 무탈한 내 일상을 굽어보며 허세도 한 번 부려본다.


나에겐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있다는 것에 기쁘고 감사하다. 물론 방금 전까지 쓸 게 없다고 고민한 것은 안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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