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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돕 Apr 26. 2024

그때로, 떠나는 마음

어제로, 그 시절로, 미래로


쓰다 보면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가는 때가 많다. 지금 나의 일상도 글쓰기의 소재가 되지만, 지금보다는 행동반경이 조금 더 넓었던 과거에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땠더라? 하고 마구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신기하게 아주 오래전 일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때가 있다.


얼마 전엔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는데 “우리 2학년 때 안경 쓰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동네 살던 그 애 있잖아. 이름이 생각 안 나서 너무 답답해.”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애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생각한 게 아니고 그냥 무의식적으로 딸려 나온 말이었다.


그다지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졸업 후 한 번도 본적도 생각한 적이 없어 우리 둘 다 뜨악하며 놀랐다. 기억력이 좋아서라기보다 내 무의식 어디 깊숙한 곳에 그 애 이름이 숨겨져 있었거니 한다. 가끔 꿈을 꾸면 당최 생각한 적도 없고 나와 그냥 스치듯 지나간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등장해 참 뜬금없다 할 때가 있는데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이렇게 마냥 잊고 있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쓰는 덕분도 같다. 그냥 기억해 내려고만 했으면 이 정도로 자세히 딸려 나올 것 같지 않은 일들도 쓰다 보면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마냥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이 놀랍다. 그래서 쓸 때 나는 내가 지나온 시간을 다시 한번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 다시 그때의 내가 되어보는 것. 그때의 마음을 새롭게 느껴보는 것.


그래서 추억이 잊는 한 인간은 늙지 않는다 했던가? 예전에 50대가 된 엄마에게 할머니 소리 처음 들으니까 어때? 했더니 좋긴 좋은데 믿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언제부턴가 몸이 아무리 늙어도 마음은 비슷하다고.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어렴풋이 애잔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몸은 중년에 다다르고 있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어린 시절, 처녀 적, 아프기 전에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 그땐 괴롭다 생각했으나 돌아보면 찬란했던 시절도 한 자 한 자 눌러 쓰다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지나온 내 삶을, 다가올 내 미래를 화초 가꾸 듯 정성 들여 돌보고 매만지는 듯한 기분이다. 마냥 좋았던 기억도 마냥 힘들었던 시간도 이제는 내 삶의 자연스러운 한 페이지가 되어 스며드는 것 같다. 흐린날도 맑은날도 다 소중해지는 마법, 그러면서 느끼는 안도와 충만이 이 행위를 계속 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 면역력 때문에 아빠랑 자던 아이가 이식 1년이 지나 나와 다시 한 침대를 쓰고 있다. 그렇게 그리웠던 아이지만 혼자 자다 옆에 누군가 있으니 첫날은 너무 어색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계속 발로 차내는 이불 덮어주느라 푹 잘 수 없었다. 습관이 무섭구나 놀랐지만 왠걸.. 이튿날 바로 적응했다. 아이의 포동한 살결과 쌕쌕 대는 숨소리를 느끼며 함께 잘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소중했다.


하지만 난 밤마다 빚쟁이처럼 시달린다. 그녀는 보통 수다쟁이가 아닌데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서 불을 끄면 자기 전 의식처럼, 꼭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처음엔 나도 재미있었지만 이제 난감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딱히 할 얘기도 없고 피곤해서 오늘은 그냥 자자고 하면 세살 아이처럼 떼를 쓴다. 아..이것도 한 때이려니 하고 각잡고 재밌는 이야기 해 주고 싶지만 어쩌랴. 이제 내 어렸을 적 얘기도 다 떨어져 가고 너 어렸을 적 얘기도 거의 다 했고.. 먼 훗날 이야기를 떠올려 봐야 하나? 상상력이 잼병인 나는 ‘가정’하는 이야기가 너무 어렵다. 


오늘 밤의 평화를 위해, 과거로 떠나며 쓰는 여행을 해봐야겠다. 뭐 하나라도 걸리길 바라면서. 그리고 말할 것이다. "리야, 나중에 네 딸이 자기 전에 재미있는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할머니가 엄마한테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서 매일밤 푹 잘잤다는 얘기도  들려줘야 해. 알았지?" 이렇게 나는 겨우 미래로도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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