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건 내보이는 글이건 내 쓰기는 다짐으로 마무리될 때가 많다. 책을 읽어도 영화 하나를 봐도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 잘 본 거라고 생각했던 내 지론이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쓰기에까지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다.
쉽게 씌어졌다고 생각된 글들을 시시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도끼처럼 띵 하고 내리치는 뭔가가 있어야, 알듯 말 듯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야 가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다. 사람이 백이면 백 다 다른 것처럼 글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분위기와 방향성을 지니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도끼처럼 내리치는 뭔가가 없어도 나는 다른 이의 글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과거의 나를 만나 안도감을 느끼고 위로받는다.
비슷한 내용이라도 비슷한 경험이라도 글마다 풍기는 향취가 다르다. 감성적이고 섬세한 결을 느낄 수 있는 글, 명쾌하고 분석적인 글, 자신의 마음을 물 흐르듯 잔잔히 풀어낸 글, 어떤 마음이든 주저하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낸 직선적인 글. 사람이 그렇듯, 글도 그 자체로 귀한 것 같다.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어떤 게 좋은 글인지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고, 난 동의 못한다며, 뻔한 얘기일 뿐이라며 콧방귀 뀌며 쯧쯧거렸던 내가 참 편협 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짧게라도 쓰는 사람의 편에 서 봤기에, 어떤 글이든 쓰는 이의 정성과 애정이 묻어있다는 걸 깨달아 서인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내가 글을 쓸 때는 왜 자꾸 이렇게 다짐하고 깨달을만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이런저런 감정을 느꼈다고만 쓰면 뭔가 허전한 것 같다. 이런저런 일들 끝에 나는 이런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남겨 지길 바란다. 이 얼마나 따분한 선생님 같은 노릇인지 알면서도 바꾸기가 힘들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생각한다.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나의 수많은 다짐과 약속들이 뭐 그리 나쁠까. 누구나 다 내 삶이 조금씩은 더 나아지길 바라지 않나. 내가 아무리 내 스타일을 강요한들 그건 결국 나 자신을 향한 것 아닌가. 자칫 글이 고루해질 순 있겠으나 나의 다짐 덕에 내 일상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지 않았던가. 내가 계몽하고 싶은 건 남들이 아니고 나 자신일 뿐인데 그게 뭐가 나쁠까.
이렇게 갈팡질팡하다 생각한다. 내가 자꾸 교훈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까닭은 용기가 부족해서구나. 그냥 내 민낯을 까발리는 대신, 거기에 살짝 분도 바르고 립스틱도 발라서 조금 더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 마냥 솔직할 수 없는 용기. 요즘은 내 마음을 어디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야 할까 고민스럽다. 실제로 좋았다 흐렸다. 다짐했다 팽개쳤다 하는 날이 부지기수기도 하다. 그런 혼란의 민낯이 뭐 대수라고 이런 공간에서까지 까발려야 하나 가만있음 중간이라도 갈 것을. 그러고 보니 이 글 역시 혼란한 민낯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 그 사람을 대변하는 건 맞지만 글만으로는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쓰는 글 역시 그렇다. 어느 날은 세상 둘도 없는 낙관주의자처럼 굴다가 또 어느 날은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미치광이처럼 군다. 다만 씀으로써 내 마음은 분명 조금 더 평온한 상태로 나아간다. 마구 기쁘지도 마구 절망하지도 않는 잔잔한 수면 속으로. 그래서 또다시 생각한다. 쓸데없는 고민할 생각에 그냥 쓰자. 눈치 보지 말고 재지 말고 하고 싶은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