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돕 May 03. 2024

주저하는 마음

그래도 그냥 쓰자

일기건 내보이는 글이건 내 쓰기는 다짐으로 마무리될 때가 많다. 책을 읽어도 영화 하나를 봐도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 잘 본 거라고 생각했던 내 지론이 혼자 쓰고 혼자 보는 쓰기에까지 그대로 드러났던 것 같다.


쉽게 씌어졌다고 생각된 글들을 시시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도끼처럼 띵 하고 내리치는 뭔가가 있어야, 알듯 말 듯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야 가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다. 사람이 백이면 백 다 다른 것처럼 글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분위기와 방향성을 지니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도끼처럼 내리치는 뭔가가 없어도 나는 다른 이의 글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과거의 나를 만나 안도감을 느끼고 위로받는다.


비슷한 내용이라도 비슷한 경험이라도 글마다 풍기는 향취가 다르다. 감성적이고 섬세한 결을 느낄 수 있는 글, 명쾌하고 분석적인 글, 자신의 마음을 물 흐르듯 잔잔히 풀어낸 글, 어떤 마음이든 주저하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낸 직선적인 글. 사람이 그렇듯, 글도 그 자체로 귀한 것 같다.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어떤 게 좋은 글인지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고, 난 동의 못한다며, 뻔한 얘기일 뿐이라며 콧방귀 뀌며 쯧쯧거렸던 내가 참 편협 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짧게라도 쓰는 사람의 편에 서 봤기에, 어떤 글이든 쓰는 이의 정성과 애정이 묻어있다는 걸 깨달아 서인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내가 글을 쓸 때는 왜 자꾸 이렇게 다짐하고 깨달을만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이런저런 감정을 느꼈다고만 쓰면 뭔가 허전한 것 같다. 이런저런 일들 끝에 나는 이런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남겨 지길 바란다. 이 얼마나 따분한 선생님 같은 노릇인지 알면서도 바꾸기가 힘들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생각한다.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나의 수많은 다짐과 약속들이 뭐 그리 나쁠까. 누구나 다 내 삶이 조금씩은 더 나아지길 바라지 않나. 내가 아무리 내 스타일을 강요한들 그건 결국 나 자신을 향한 것 아닌가. 자칫 글이 고루해질 순 있겠으나 나의 다짐 덕에 내 일상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지 않았던가. 내가 계몽하고 싶은 건 남들이 아니고 나 자신일 뿐인데 그게 뭐가 나쁠까.


이렇게 갈팡질팡하다 생각한다. 내가 자꾸 교훈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까닭은 용기가 부족해서구나. 그냥 내 민낯을 까발리는 대신, 거기에 살짝 분도 바르고 립스틱도 발라서 조금 더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 마냥 솔직할 수 없는 용기. 요즘은 내 마음을 어디까지 있는 그대로 보여야 할까 고민스럽다. 실제로 좋았다 흐렸다. 다짐했다 팽개쳤다 하는 날이 부지기수기도 하다. 그런 혼란의 민낯이 뭐 대수라고 이런 공간에서까지 까발려야 하나 가만있음 중간이라도 갈 것을. 그러고 보니 이 글 역시 혼란한 민낯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이 그 사람을 대변하는 건 맞지만 글만으로는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쓰는 글 역시 그렇다. 어느 날은 세상 둘도 없는 낙관주의자처럼 굴다가 또 어느 날은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미치광이처럼 군다. 다만 씀으로써 내 마음은 분명 조금 더 평온한 상태로 나아간다. 마구 기쁘지도 마구 절망하지도 않는 잔잔한 수면 속으로. 그래서 또다시 생각한다. 쓸데없는 고민할 생각에 그냥 쓰자. 눈치 보지 말고 재지 말고 하고 싶은 만큼.


이전 08화 그때로, 떠나는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