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by 스돕

새 병원에서 맞는 첫 아침이었다. 아침 밥상에 딸려 온 수저 포장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또 한 번의 기적처럼 피어나요”.


때는 가을이었지만 내 마음은 벌써 겨울… 싸늘한 이 계절 몇 마디만 지나면 정말 봄꽃처럼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센티한 마음으로 밥을 뜨는데 옆 침상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밥 먹기 싫다는 할머니와 한 술이라도 뜨라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이것저것 권하며 사정하는 할아버지에 아랑곳없이 할머니는 먹기 싫다는 사람한테 왜 그러냐며 톡톡 쏘아대기 일쑤였다. 난 속으로

‘거 할머니 너무 하시네. 할아버지가 생각해서 그러시는데 한 숟가락만 먹어주지’ 하며 훈수를 두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아이 다루듯 어르고 달래고 또 협박도 하시다 할머니 밥 먹이기에 성공하셨다. 덩달아 나도 기뻤다.


식사를 마친 할아버지는 내게 밖에서 사 온 요플레 하나를 건네주셨다. 사실 난 면역수치가 바닥이라 유산균이나 생과일 같은 음식은 금기였지만, 감사하게 받았다. 그리고 낯설고 어색했던 병실이라는 공간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오후엔 내 앞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긴 파마머리에 하얀 얼굴, 살짝 허스키하지만 빠르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 환자복을 입지 않았으면 전혀 환자 같지 않았을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 젊은 사람이 어쩐 일일까 궁금했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어수선한 표정의 그녀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내가 처음 병을 맞닥뜨렸을 때처럼 얼마간 넋이 나간 그녀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하루아침에 4기 암환자가 된 사람이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처음 본 나에게 자신의 스토리를 쏟아내는 그녀에게 뭐라 위로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젊으니 회복할 수 있을거라고, 자꾸 나쁜 생각에 빠지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했다. 나에게 해주고 픈 말이기도 했다.


젊은(?) 우리 둘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티키타카를 보며 자주 웃었다. 그리고 가끔은 병원 복도에 마주 서서 할아버지에게 위로를 건넸다. 하루 종일 아내를 돌보고 쪽잠을 자는 긴 간병 생활로 할아버지는 점점 말라갔다.


힘들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병간호를 어찌 그리 잘하시냐고 추켜세우면, 본인이 젊을 적 자기 마음대로만 산 게 미안해서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한다며 할머니를 감싸주셨다. 할머니 상태가 나빠진 날이면 우리도 걱정이 되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젊은 사람이 걱정이지, 우리같이 살만큼 산 노인네들이야 언제 가도 이상할 게 없다며, 도리어 우리를 걱정해 주시곤 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죽음 앞에 이렇게 초연해질 수 있을까? 아직도 문득문득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는 내게, 그리고 1년 전, 아빠의 발병 사실을 알고 혼비백산을 했던 내게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병원 복도를 거니는데 동자승처럼 머리를 빡빡 민 아이들이 보였다. 엄마와 거닐며 재잘대는 아이, 형아를 부르며 돌진하는 아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이. 어린아이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가히 충격이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병원학교'라고 이름 붙여진 교실 앞에는 투병 중인 아이들이 손수 그리고 만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초등학교 1학년인 내 막내 딸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아.. 40넘은 젊은(?) 나도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저 어린아이들은.. 아이들의 부모는 어쩌라고.. 집에 있는 딸아이들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편으론 벌써 머리까지 밀고 나보다 앞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고 있는 아이들이 대견해 보였다. 게다가 아이들은 웃고 있었다.


글쎄.. 이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본 이후로 난 내가 중병환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 억울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닥친 것이다. 내 앞에 닥친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헤쳐나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온 것만도 감사한 일이고 내 아이가 집에 있을 수 있는 것만도 정말 복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 내 아이 대신 다른 아이들이 아픈 건 아니지만.. 뭔가 아이들을 이용해 내가 위로받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삐져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를 걱정해 준 것처럼 그 아이들이 나를 걱정해 준다면 나도 할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가야 난 괜찮아. 나도 최선을 다해 노력할 거야. 너도 꼭 나을 수 있어.라고


그리고 독한 항암과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날 보며 항상 눈이 젖어있던 엄마아빠. 남편, 가끔 전화 오는 친구들에게도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난 괜찮다고..최선을 다해 잘하고 있다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몇 년간의 투병기간에도 불구하고, 몇 달전 이미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들은 상태였다, 다만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없어 일반 병동에 머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지극정성 덕분인지 할머니는 생각보다 오래 버텨 주셨고, 내가 항암을 몇 차례 진행하는 사이 결국 하늘 나라로 가셨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한들, 직접 목도한 죽음 앞에 슬픔과 회한으로 허우적거릴 줄로만 알았을 할아버지의 얼굴은 생각보다 편안해 보였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몇 달은 덤으로 산 인생이었다며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맑은 눈빛으로 덤덤히 말씀하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나도 이렇게 늙어가고 싶었다. 주어진 생에 감사하고 하루하루 후회없이 살아가려 노력하는 어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