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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혜 Apr 28. 2023

우리는 돌아서서 말을 해

가즈오 이시구로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그 자체를 하나의 문제적, 사회적, 문학적 작품으로 만들어버린 가즈오 이시구로는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도쿄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는 중이었는데 토론석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흔히 하는 질문, 곧 다음에 내가 어떤 작업을 할지를 물어봤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질문지는 내 작품들이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살아온 개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더 어둡고 수치스러운 기억과 화해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짚더군요. 그 여자분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도 비슷한 영역을 다루실 건가요?

    그 질문에 나는 나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 나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분투하는 그런 개인들에 관해 써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은 한 민족이나 공동체가 그런 질문들을 어떻게 직시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한민족 역시 한 개인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망각할까요? 아니면 중요한 차이가 있을까요? 한 민족의 기억이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그런 기억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요? 그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통제될까요? 되풀이되는 폭력을 멈추고, 한 사회가 산산조각 나 혼돈이나 전쟁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잊어야 할까요? 다른 한편으로, 의도적인 기억 상실이나 부실한 정의라는 기초 위에 과연 안정되고 자유로운 국가가 세워질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쓸 방법을 찾아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장은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질문자에게 대답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중에서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는 과연 어떤 글을 쓰는가. 유행과는 다른 또 다른 무언가, 조금 더 새롭거나 다른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만한 이야기인가. 오직 그런 내용의 이야기가 쓸모 있다면 지금 내 책장에서도 버려야 할 책들이 너무도 많다. 즉 이야기는 그런 목적으로 시작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로서 역할을 충실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렇게 결과에 대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기에 누구든 시작할 수 있고 끝맺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나의 사적인 일들을 회상한 내용을 글로 옮겨 놓으면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고 이끌어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삶의 모든 모양들은 결국 또다시 흘러가고 이어진다.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나의 경우 이야기는 후회나 기쁨, 슬픔이나 희망. 이런 단어로 표현하는 인생의 전환점을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기쁜 일이면 반복하면 좋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날의 기쁨을 반복하기 위해 똑같은 상황을 만들지만 그 기쁨만큼 감동이 밀려오지 않았던 일이 대부분이었다. 뭐든 처음 느낌이 가장 날것과 같다. 기쁨을 반복하다 보면 그건 소소한 재미 정도로 전락한다. 나의 기쁨을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다. 기쁨과 반대되는 모든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순간의 일들을 포착하기를 좋아한다. 되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노력이 바로 글쓰기다. 언젠가부터 인생에 순간이란 다시 오지 않을 일들임을 깨닫고 글쓰기가 더욱 절실해졌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싶었던 마음은 그렇게 내가 됐다. 신기하게도 삶에서 마주한 소소한 전환점들을 글로 옮겨 놓으면 다시는 그 일이 반복되지 않을뿐더러 나의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소설로는 한 번도 데뷔한 적이 없었던 어느 평론가가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한때 직장인 비슷한 생활을 했던 나의 상황이 떠올라 울기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야기가 끌어당기는 힘에 나는 또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다가 끝내 다른 이들에게도 그 소설을 한 번 읽어봐라, 하며 권했다. 평론가의 소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견을 장착하고 이야기를 읽었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방송일을 하던 어느 선배는 말했다. 그거 나도 읽어봤다. 뭐 별거냐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더라, 하는 시시한 대답이었다. 평론가의 소설이라는 생각을 안 했더라면 조금 달랐을까. 작가가 누군지 몰랐더라면 과연 이야기에 자유했을까? 그 시작은 나 역시 그 선배와 다를 바 없었겠지만 나는 선배와 그저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선배의 감상평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네? 이 이야기를 읽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다고? 의아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선배와의 대화는 그 이후로 멈춰 섰다. 선배와의 만남 이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와 공감의 영역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썼고 쓰고 난 뒤 작은 전환점을 맞았다. 나와 다른 이야기를 추구하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그렇게 정리됐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나와 함께 밥을 먹는 순간엔 늘 말했다. 나는 비건은 절대 못해. 그럼 내가 대답했다. 저도 비건은 아니에요. 사실 비건은 조금 다른 개념인데.. 이렇게 설명하기에 바빴다. 같은 설명을 몇 번이나 했는 줄 모른다. 만남이 지쳤을 법도 한데, 그러나 그녀와의 전환점은 없었다. 내가 원했던 그 지점을 어느 평론가의 소설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완성해 줬다.


이야기를 읽지 않고 쓰지 않아서 우리는 꽤 많은 시간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소비한다. 실패하고 힘겨울 줄 알면서도 애써 남아있는 에너지까지 쓰려한다. 조금 더 잘하려는 욕심과 시기와 질투는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옳다고 여기게 하며 조금 더 달리도록 만든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전환점이 필요하다. 나의 하루를 종이에 펼쳐 아주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만 정해 놓고 글을 쓴다. 그 행위는 내일의 나를 새롭게 한다.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도 나의 세상에서 만큼은 적어도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억지로 쿨해지고 싶었던 마음가짐이 한결 가벼워진다. 글쓰기를 통한 아주 작은 변화가 주변으로 퍼지고 많은 사람에게 닿으면 그건 세상을 변화시킨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언제나 시대를 담았다. 작가가 고백했듯, 그 시대가 영국이든 일본이든 작가는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이야기를 완성했다. 적어도 오늘 나의 영국을, 오늘 나의 일본을 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라 여기며 그 일을 사명처럼 견디며 글을 썼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할 말이 많았다. 삶의 전환점이란 드라마틱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닌 우리 일상에서 작은 단위로 숨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화는 어떤 주제인가. 그 이야기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 이야기의 출발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가. 꼭 내가 있지 않아도 되는 문제인가. 오늘의 전환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돌아서서 했던 말들을 다시 되돌아본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다시금 반복되지 않을 모든 순간이 영화 같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 적어도 나의 세상을 변화시킬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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