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도쿄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는 중이었는데 토론석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흔히 하는 질문, 곧 다음에 내가 어떤 작업을 할지를 물어봤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질문지는 내 작품들이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살아온 개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더 어둡고 수치스러운 기억과 화해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짚더군요. 그 여자분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으로도 비슷한 영역을 다루실 건가요?
그 질문에 나는 나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 나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분투하는 그런 개인들에 관해 써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것은 한 민족이나 공동체가 그런 질문들을 어떻게 직시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한민족 역시 한 개인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고 망각할까요? 아니면 중요한 차이가 있을까요? 한 민족의 기억이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그런 기억은 어떻게 자리 잡고 있을까요? 그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통제될까요? 되풀이되는 폭력을 멈추고, 한 사회가 산산조각 나 혼돈이나 전쟁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잊어야 할까요? 다른 한편으로, 의도적인 기억 상실이나 부실한 정의라는 기초 위에 과연 안정되고 자유로운 국가가 세워질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쓸 방법을 찾아보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장은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질문자에게 대답했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