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의 정체성이론과 다문화청소년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인간의 발달을 평생에 걸친 여덟 단계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로 설명한다. 각 단계마다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주요 심리사회적 위기(psychosocial crisis)가 있으며,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면 긍정적인 자아 특성(덕목)을 획득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만약 위기 해결에 실패하면 특정 문제에 고착되거나 부정적인 특성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에릭슨의 이론에서 청소년기(대략 12~18세)는 다섯 번째 단계인 '정체성 대 역할 혼란(Identity vs. Role Confusion)'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주된 발달 과업은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청소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다양한 역할과 가치관을 탐색하고 실험하며, 그 결과 자신만의 일관되고 통합된 자아상(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은 일시적으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 '충실성(Fidelity)'이라는 덕목을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역할 혼란을 경험할 수 있다.
에릭슨의 정체성 이론은 다문화청소년이 겪는 독특한 정체성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다문화청소년은 부모의 문화와 주류 사회의 문화라는 두 가지 이상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야 하는 복합적인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적 탐색과 혼란의 심화: 대부분의 청소년이 겪는 정체성 탐색은 다문화청소년에게 더욱 복잡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주류 사회의 가치관, 규범, 기대뿐만 아니라 부모의 본래 문화에서 오는 가치관과 기대를 동시에 경험한다. 예를 들어, 명절, 음식, 언어, 가족 관계 방식 등에서 두 문화의 차이를 인지하고, 어떤 문화적 요소들을 자신의 정체성에 포함시킬지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한국인인가, 아니면 부모님의 나라 사람인가?", "나는 두 문화 중 어느 쪽에 더 소속감을 느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직면하며, 일반 청소년보다 더 큰 역할 혼란이나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수 있다. 때로는 두 문화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marginalization)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다중 정체성 형성의 가능성: 에릭슨은 정체성 형성을 통합되고 일관된 자아를 만드는 과정으로 보았지만, 다문화청소년의 경우 단일한 정체성보다는 다중 정체성(multiple identities)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즉,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부모님의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거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전환하며 살아간다. 성공적인 다중 정체성 형성은 각 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통합하여 더욱 풍부하고 유연한 자아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문화적 역량과 적응력을 높이는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적 맥락과 상호작용의 중요성: 에릭슨은 정체성 형성에 사회적 환경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문화청소년에게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이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 가족: 부모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자녀에게 전달해 주는지, 두 문화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가도록 돕는지에 따라 자녀의 정체성 형성이 달라진다.
- 학교 및 또래 집단: 학교에서 다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이루어지는지, 또래들로부터 차별이나 편견을 경험하는지 여부는 다문화청소년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긍정적인 피드백과 소속감은 건강한 정체성 형성을 돕지만, 부정적인 경험은 역할 혼란과 심리적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
- 사회 전체: 미디어의 다문화 관련 이미지, 사회 정책, 그리고 일반 대중의 다문화 수용 태도 역시 다문화청소년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거시적인 환경이 된다.
에릭슨이 말하는 정체성 위기를 다문화청소년이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원이 필요하다.
탐색의 기회 제공: 다양한 문화 활동, 동아리,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을 탐색하고, 동시에 부모의 문화와 주류 문화를 폭넓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는 에릭슨이 말하는 '심리사회적 유예(psychosocial moratorium)'의 기간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돕는다.
긍정적인 역할 모델 제시: 성공적으로 다중 정체성을 통합한 다문화 성인이나, 자신이 존경할 만한 다양한 배경의 롤모델을 접하게 하여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사회적 지지 체계 구축: 가족, 학교, 지역사회, 그리고 전문가(상담사 등)가 연대하여 다문화청소년에게 정서적 지지, 정보 제공, 그리고 갈등 해결을 위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학교 현장에서는 다문화적 감수성을 높이고 차별 없는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적 자긍심 고취: 자신의 이중문화적 배경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강점임을 인식하도록 돕는다. 부모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동시에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에릭슨의 정체성 이론은 다문화청소년의 복잡한 내면세계와 외부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며, 이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진 건강한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돕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