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치는 소리에 움찔했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 밖에는 빗금을 그리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어. 어렴풋이 폭우 일기예보가 떠올랐어. 지난밤 너를 생각하다 잠이 드는 바람에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채였지. 나는 비척대며 일어나 집안의 창문을 닫고 커튼도 쳤어. 실내가 꽤 서늘했어.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어. 그래봤자 커튼 사이로 번쩍이는 빛이 들어왔고 천둥소리, 바람에 부딪는 나무 소리, 저 멀리 뭔가가 구르는 소리까지 들렸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지.
번개가 치는 순간 눈을 뜨고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어. 네 시 반. 억지로 잠을 청할 만큼 깊은 밤은 아니었어. 현관 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어. 다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현관에 있는 작은 창문을 깜빡한 거야. 웬만하면 항상 열어두고 신경도 쓰지 않는 창문. 얼른 일어나 현관 앞 창문으로 갔어. 좀 빡빡해서 간신히 닫았네. 한결 조용해진 것 같아.
어깨를 웅크리며 방으로 돌아왔어. 침대로 들어가 발바닥을 비벼대며 몸을 웅크렸어. 이불을 꽉 움켜쥐듯 끌어당겼지. 어제 낮엔 하늘도 맑고 포근했는데 몇 시간 만에 이토록 스산한 날씨라니. 마치 너와 나의 관계처럼 갑자기 변해버렸어. 문득 마음이 휑해. 감기라도 걸릴 듯한 기분이야.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어.
너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나를 떼어낸 후련함에 깊은 잠을 자고 있을까. 나보다 추위를 많이 타니까 벌써 두꺼운 이불을 꺼내서 덮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보일러까지 켰을 수도 있겠어. 혹여 나처럼 잠에서 깼다면 따끈한 우유라도 한 잔 마시려나. 몸을 얼른 데우는 데 따뜻한 음료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이제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할 수가 없으니 그냥 이렇게 나 혼자 상상할 수밖에 없네. 어떻게든 부디 따뜻하게 있길 바라.
돌이켜보면 우리의 온도에 반응은 퍽 달랐어. 며칠 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길에서 나는 외투 없이 티셔츠만 입었지만 너는 카디건에 모자, 머플러까지 두르고 있었지. 그러고도 너는 썰렁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어. 네게 벗어줄 요량으로라도 외투를 입고 나왔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왔지. 결국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시켰어.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너는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
핫초코를 양손에 감싸 쥐고 너는 말했어. 어렸을 적 살던 집은 단열이 잘되지 않았다고. 그래서인지 추위에 민감하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어. 나 역시 춥게 자랐거든. 어머니는 시원한 게 건강에 좋다며 나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지 않았어. 겨울에도 보일러를 약하게만 틀었지.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옷을 얇게 입는 편이고. 내 말에 너는 입을 삐죽였어. 그건 선택한 시원함이라고, 같은 계절 같은 날씨를 겪었더라도 우리가 느낀 온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네 말투에 찬 기운이 날카롭게 서린 듯했어. 할 수만 있다면 너를 감싸줄 반려 태양이라도 선물하고 싶었어. 깊숙이 박힌 냉기를 부드럽게 풀어줄 따뜻함 말이야.
어제 너는 그만 만나자고 했어. 발음 하나하나 놓칠 수 없을 만큼 명확했어.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지. 어쩌면 나도 지쳤는지 몰라. 나와 다른 너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로 내내 고민했어. 진즉부터 보냈을 너의 신호를 무시한 건 아니었을까. 혹여나 너는 내가 붙잡아주길 바란 건 아니었을까. 이내 고개를 내저었어.
어제 잠들기 전까지도 고민했어. 너는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을까. 내 멋대로 너를 재단하지는 않겠어. 네가 명확하게 말해 준 적은 없으니까. 아니, 말해줬대도 그게 내게 제대로 전달되었을 거라는 보장도 없지. 같은 말을 듣고도 다르게 받아들이고,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기도 하는 게 우리 사람이잖아.
아무튼 우리가 어쩌다 멀어진 것일지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드네. 네가 있던 곳과 내가 있던 곳의 온도가 달라서는 아니었을까. 지난 산책길에서처럼 같은 곳에 있더라도 서로 느끼는 온도는 달랐고 말이야. 하필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 네가 싫어하는 계절. 이불 안에 웅크린 채 양손을 모으고 중얼거렸어. 부디 날씨가 우리를 더는 멀찌감치 갈라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어. 어제 일기예보를 흘려들은 게 기억났고, 일기예보만 정확해도, 아니 귀 기울여 들어도 우리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네가 추울 만한 날씨라면 외투 하나쯤 더 챙기는 배려도 하면서.
바깥이 아까와 달리 조용해. 갑자기 현관 앞 작은 창문이 떠오르네. 그건 열어두기만 하고 신경은 쓰지 않았지. 매일 여닫는 창문의 먼지만 닦았고, 그 창문 밖의 풍경만 쳐다봤어. 어쩐지 그 작은 창문 밖을 쳐다보고 싶어 이불 밖으로 나왔어. 비는 잦아들었어. 날이 새려는지 희붐해. 그래도 현관 앞 창으로 아파트 건물, 건물 너머 정원과 나무들이 보여. 문득 너와 내가 바라보는 창밖 역시 달랐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보는데 왜인지 눈물이 나네. 저 빗물도 볼을 타고 내려가는 내 눈물처럼 아래로 내려가겠지. 땅으로 스며들 거야. 어딘가 고여 있다가 증발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언젠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갈 거야. 그리고 우박이나 눈, 비가 되어 또 내려오겠지.
물이 온도에 따라 상태를 바꾸더라도 성분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태어났을 적부터 지금까지 사람이야. 어디에 살든, 무엇을 공부했든, 무엇을 먹든, 어떤 옷을 입든 상관없는 사실이지. 그렇지만 우리는 거리낌 없이 순환하는 물과 달라. 각자 가진 렌즈를 통해 세상을 봐. 심지어 눈물만 흘려도 바깥 풍경은 굴곡되는 걸. 결국 남들과 어긋나고 멀어지기 일쑤야. 우리 몸의 절반 이상이 물이라는 건 별 의미가 없나 봐. 지금 네 눈앞의 풍경이 궁금해. 외로워. 외로워. 너도 그렇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