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다섯 시 반, 저절로 눈이 떠졌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남편은 자고 있고 S·Y 부부의 방도 조용했다. 나도 더 잘까? 하고 눈을 감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카우아이섬에 가던 날, 그림 도구 없이 나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림으로 여행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한 장이라도 더 그리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용히 일어나 잘 때 입었던 티셔츠에 바지만 갈아입었다. 배낭에 그림 도구를 챙겼다. 산책하러 간다는 메모만 남겨놓고 살그머니 숙소를 나섰다.
여섯 시, 밖은 환했다. 몇몇 가게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한낮만큼은 아니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으로 뛰는 사람, 개와 산책하는 사람, 일찌감치 바다로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나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천천히 걷는 사람도 보였다. 도로에는 차량도 꽤 다니고 있었다. 응급구조 차량과 경찰 차량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나는 카피올라니 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날 공원 초입의 동물원 근처까지만 둘러봤기에 공원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창밖을 봤을 적에는 날씨가 흐린 듯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꽤 강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해변을 따라 공원으로 갔다. 아까 지나간 구조 차량이 보였다. 해변에 수영복 차림의 뚱뚱한 아저씨가 엎드려 있고 구조 대원이 양쪽에 서 있었다. 아마 물에서 구해낸 뒤 아저씨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해변을 벗어나 공원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멀찌감치 다이아몬드 헤드와 너른 잔디밭이 보였다. 스프링클러는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었고 운동하는 사람도,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도 있었다. 나무 밑에 이불 뭉치가 보였는데 형태를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그 안에 여자가 누워있는 듯했다. 수탉이 힘차게 목을 돋구는 소리가 들리고 각종 새가 포로록 날아다니며 서로 안부라도 묻듯 재잘거렸다. 녀석들은 쓰레기통에 들어가 지난밤 인간들이 뭘 버렸는지도 확인했다.
내가 선 자리에서 왼쪽의 먼 하늘엔 먹구름이 있었지만, 바로 위와 오른쪽은 하늘이 파랬고 햇빛은 그사이 더욱 강해졌다.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를 찾아 앉았다. 크로키북과 색연필을 꺼냈다. 눈앞의 풍경과 공기를 그리기로 했다. 이른 아침의 바람이 상쾌했는데 가끔 물방울이 내게 닿았다. 스프링클러는 멀찌감치 있기도 하거니와 바람의 방향을 고려할 때 왼쪽의 먹구름에서 오는 빗방울인 듯했다. 나는 맑은 하늘 아래에 앉아 있지만 비를 맞고 있다고나 할지.
모자는 날아갈 듯 들썩여서 진즉 배낭 안에 두었지만, 크로키북의 얇은 종이까지 바람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왼손에 색연필 몇 개를 쥐고 그 손으로 종이를 지그시 눌렀다. 여전히 종이가 펄럭였지만 빠르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 사이 개미가 종이 위로 올라오고 구름도 바람에 떠밀리며 움직여서인지 그늘이라고 앉은 내 자리에도 햇빛이 자꾸만 기웃거렸다.
휘리릭 그린 뒤 색연필은 가방 안에 넣고 펜만 꺼내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상황을 적어넣었다. 소리와 바람의 방향, 공기의 시원함까지. 굳이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완성도 높은 그림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뿌듯했다. 동영상을 찍고, 그림을 조금 더 손보기도 했다.
다시 배낭에 짐을 챙겨 넣고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숙소를 나선 지 고작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인데, 공원의 풍경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햇빛만 강해진 게 아니라 사람이 더 많아졌다. 나무 아래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낭만 청년도 보였고 공원 연못가에 서서 새에게 먹이를 주는 귀여운 소녀도 보였다.
잠에서 깬 노숙자도 많았다. 해변가의 옷차림은 워낙 다양하고 단출해서 의상으로 관광객과 노숙자가 딱 구별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들의 옷은 구겨졌으며 눈빛에는 졸음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옆에 둔 배낭은 꼬질꼬질했다.
불현듯 나도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외선 차단제만 발라 번들거리는 얼굴에 모자에 눌렸다가 바람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 잘 때 입어서 구겨진 데다가 헐렁한 벽돌색 티셔츠, 품이 넉넉하고 자주 입어서 색깔이 바랜 올리브색 카고바지, 그리고 전날 돌아다니며 자외선 차단제 바른 손으로 만져서 허연 얼룩이 그득한 검은색 배낭.
머리라도 가릴 요량으로 가방을 뒤적여 모자를 꺼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음 아침 산책에는 최소한 구겨진 옷을 입지는 말자고. 길거리 화가는 괜찮지만, 노숙자는 좀 그렇잖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