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영어를 못하는 척할 걸

by 괜찮은 작가 imkylim

여행 중에 만난 사람과의 가벼운 대화가 모두 편안하고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것 같은 대화도 있다. 떠나는 날 아침, 여행 기간 내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와이키키 해변을 제대로 그려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와이키키 해변 벤치에 앉아 크로키북을 펼쳤다. 왼쪽에는 한 여인이 커피를 마시며 해변을 감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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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가가 촉촉했다. 놀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오늘 아들을 두고 하와이를 떠나게 되어 너무 슬퍼서 운다고 말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는 말을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고는 했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나는 위로의 언어를 건네는 일이 우리말로도 조심스럽고 어렵다. 그런데 한국말도 아닌 영어였다. 즐거운 대화는 다소 정확하지 않은 어휘와 문장도 용인될 듯하지만, 위로는 엉뚱한 뉘앙스를 썼다가 더 마음을 아프게 하면 곤란했다. 더군다나 나로서는 영어로 스몰톡이라면 모를까 위로를 건네야 하는 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솔직히 그녀의 상황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서핑, 하이킹 등 다양한 활동을 좋아해서 하와이가 즐겁게 생활하기에 최적이라고 했다. 실로 그녀가 보여준 아들의 사진을 보니 근육이 튼실한 게 운동을 굉장히 많이 한 몸이었다. 아들은 하와이에서 마냥 노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드는 직장을 얻어 몇 년째 따로 살고 있으며 그녀는 일 년에 한 달쯤은 아들과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남편과 딸이 있는 뉴저지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까지 슬퍼할 일인가 싶었다.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자세한 내막을 물어볼 수도, 그럴 사이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 나의 MBTI 유형은 대문자 T란 말이다.


대화가 멈춘 사이,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건 말건 그녀가 슬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그림으로 기분을 좀 풀어주면 어떨까 하고. 하지만 그림 속 그녀는 슬퍼서 우는 느낌을 고스란히 풍기고 있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는데 어쩐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림마저 그녀의 슬픔을 더 증폭시키는 것 같아 난처했다. 괜한 짓을 했나, 할 즈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를 건네었다. 좋은 만남이었다, 한국에 잘 돌아가라는 일상적인 인사였지만 나는 어버버할 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그려서 기분이 안 좋냐고 묻기도 그렇고,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려봤는데 망쳤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결국은 난감하고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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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녀의 말을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주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후회가 들었다. 괜히 뭔가 해 보려다가 더 어색해졌다. 제대로 위로해 줄 수 없었다면 울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차라리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척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써먹을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다음에는 이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영어 위로 표현을 한 문장씩 꼭꼭 새겨보았다.


"I'm so sorry for your loss."

상대의 상실감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할 때.


"I can't imagine what you're going through, but I'm here for you."

상대방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곁에서 돕겠다는 의지를 전달할 때.


"Thinking of you and your family during this difficult time."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대방과 그 가족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 때.


"I'm here for you, no matter what."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겠다는 뜻을 알릴 때.


"It's okay to feel sad/angry right now."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을 느껴도 괜찮다고 말해줄 때.


"You're not alone in this."

혼자가 아니며,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음을 상기시킬 때.


"I don't have the right words, but I can listen."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그저 들어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할 때.


"Thanks for sharing this with me."

마음속 이야기를 나와 나누어 주어 고맙다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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