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2 생활 속의 과학 단원에는 ‘가상현실’이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가상’의 뜻을 설명하자 한 학생은 ‘가짜’와 같은 거냐고 물었고, 또 다른 학생은 ‘상상’과 뭐가 다르냐고 물었어요.
* 가상(假想):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사실이라고 가정하여 생각함.
* 가짜(假짜):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민 것
* 상상(想像):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봄.
먼저 가상과 가짜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가상’은 실제는 아니지만 실제처럼 느껴지도록 한 것 혹은 사실로 가정하는 것이고, ‘가짜’는 진짜인 척하면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가상현실, 가상화폐, 가상의 선을 긋다, 가짜 뉴스와 가짜 돈(위조화폐), 짝퉁을 생각하면 되겠지요. 짝퉁은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지나 영상 등에서 가상과 가짜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의도와 맥락이 가상과 가짜를 정하는 셈인데, 생성형 AI가 생산한 것들을 보며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고 느끼는 건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상상과 가상은 어떨까요.
‘상상’이 들어가는 어휘에는 상상력, 상상화, 상상의 동물 등이 있어요. 본 적 없는 코끼리(象)의 형상을 그려 보듯(想), 상상은 자유롭지요. 현실의 규칙 따위 잠시 내려놓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거나 바다가 하늘 위에 펼쳐져도 상관없어요. 상상은 개인의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종종 창작으로 이어집니다.
‘가상’은 기술이나 과학, 게임 등과 잘 어울리고 현실의 규칙을 어느 정도 지킵니다. 이런 특징은 가상의 가(假)에 있는 거짓, 임시, 빌리다, 는 뜻에서 비롯된 듯해요. 우리가 예시를 들 때 쓰는 ‘가령(假令)’이라는 말도 ‘가정하여 말하자면, 예를 들어’ 이런 뜻이랍니다. 가령, 가상화폐는 화폐로서의 가치와 기능을 기본으로 탄생했고, 가상현실 축구게임도 축구의 규칙이라든가 상황을 빌려와 만들었어요. 상상의 동물을 게임이나 시스템에 구현할 때도 일단은 상상에서 빌려와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모든 가상의 시작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를 비롯한 인간의 상상입니다. 상상이 가상을 낳은 셈이니, 상상은 가상의 어머니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상상은 가상을 낳고, 가상은 기술 발전 덕에 현실을 더욱 정교하게 닮아가요.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지능을 닮은, 어떤 면에서는 능가하기도 하는 인공지능(AI)을 만들어냈어요. 상상, 가상, AI를 떠올리다 보니 인간의 상상력과 AI의 창조력은 뭐가 다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때로 비논리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개인의 기억이나 감정에 기대기도 하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조합과 변형으로 이루어질 때는 AI의 창조력과 비슷해요. 어느덧 인간이 상상하며 요청하면, AI가 그 상상을 곧바로 구현하는 세상이 되었고, 인간과 AI의 창작물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작가 윤고은의 단편 소설 ‘테니스나무’가 떠오릅니다. 여기서 T는 AI 직원을 말합니다.
「정보를 주지 않으면 내 대화 상대가 T인지 인간인지 알아채기가 어렵다는 것은 회사 내부의 소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메일로 업무를 처리할 때는 더 그랬다. 나중에는 T와 T 아닌 인간을 구분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 관심 밖의 일이 되어 갔다. 그런 걸 구분하는 건 별 쓸모가 없었다. 나중에야 그 직원이 T였구나 하고 새삼 놀랄 때도 있었다. 사람이 진국이라는 평판이 돌던 동료가 알고 보니 T였더라, 하는 일도 흔해서 그런 건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AI는 앞으로만 무한대로 달리지만 인간은 역주행도 할 수 있는 존재라고요. 그런 생뚱맞음이 우리를 상상하는 존재로 만든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