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2일 차에는 입관식을 진행한다
PS. 1주기 제사를 끝낸 지금까지 이 글을 마무리 못하고 있는 상황이 한심스럽지만, 프리랜서라는 고된 삶을 태어나서 처음 겪다 보니 생활이 매우 불규칙해졌다. 시작부터 잘못 생각했다.
집지를 재미로 만드는 부자 아버지의 막내 아들, 레저형 사장과 일한다는 건 고정적인 수입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덕분에 나는 반백수 신세로 전락했고, 요즘은 당근마켓에 물건을 팔거나, 알바 찾기에 바쁜 신세가 되었다.
아무튼, 시작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입관식
가족이 차례로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며 인사를 건네고, 상주인 자녀들이 고인에게 신을 신겨주는 의식이 끝난 후, 수의를 곱게 입으신 아버지 시신을 대렴하는 절차가 시작되었다. 상조 팀장은 그 과정이 약 2~30분가량 진행된다고 말했고, 입관식에 참여한 스님 중 끝까지 남아계셨던 진광스님이 깜짝 놀라시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으셨다.
"그렇게나 걸리나요?"
오늘 오전, 상조팀장이 내내 접던 '끈'의 정체가 밝혀졌다. 아버지는 왕실 대렴으로 시신을 모셨는데, 조선시대 왕의 빈소를 담당했던 '빈전도감'에서 행했던 절차 중 옥체를 여러 종류의 옷가지로 감싸는 과정인 소렴과 대렴 절차를 현대에 응용하여 필요한 수의, 홑이불 등 각종 물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좀 어려운 내용이라서 위키 백과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고, 내 기억을 바탕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만약 2022년 초 KBS에서 방송한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마지막 회를 보았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드라마는 태종이 승하한 뒤, 내관들이 옥체를 모시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해 흥미롭게 보았더랬다.
그 과정을 몇 달도 안 되어 바로 눈앞에 보게 될 줄이야.
- 대렴 -
소렴은 고인을 염하는 첫 번째 염으로써 최소의 매듭수인 일곱 매듭을 짓고 입관하는 것으로 이 소렴을 마치면 곧바로 입관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음 단계인 대렴까지 진행할 수 있다.
대렴은 소렴을 마친 고인을 바로 입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정중히 스물한 번의 매듭을 지어 경건히 모시는 장례 절차이다. 소렴에서 대렴까지 마친 고인의 시신은 비로소 입관 단계에 이르게 된다.
소렴(小斂)의 밖을 다시 싸 입관(入棺)하는 의식. 염(殮)하기 2각 전 대렴상(大斂牀)을 설치하고 종친과 백관이 손을 씻고 요[褥]와 자리[席], 베개[枕]를 놓는다. 다음으로 시신을 묶는 교(絞)를 펴는데, 가로로 묶는 것은 5개는 아래에 두고, 세로로 묶는 3개는 위에 둔다. 가로로 묶는 것은 직물 2폭을 6조각으로 찢어서 5조각만 쓰고, 세로로 묶는 것은 직물 1폭을 3조각으로 찢어서 쓴다. 다음으로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면복 1습(襲)과 산의(散衣)를 깐다. 염의(斂衣)는 모두 90칭(稱)으로, 겹옷과 겹이불을 사용한다.
영좌(靈座)와 전(奠)을 서남쪽으로 옮긴 후 소렴교(小殮絞)를 묶는다. 대행을 대렴상에 옮긴 후 소렴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염하고, 교를 묶는다. 염을 할 때 이불은 2개를 쓰는데, 1개는 깔고 1개는 덮는다. 묶기를 마치면 보쇄(黼殺)로 시신의 발부터 위쪽으로 올려 싸고, 금모(錦冒)로는 머리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 싼다. 이어 칠대(七帶)를 맨 후 재궁(梓宮)을 받들고 들어가 대행상(大行牀) 남쪽에 놓고, 대행을 재궁에 모신다.
평소 빠진 치아나 머리털ㆍ깎은 손톱ㆍ발톱을 재궁의 네 귀퉁이에 넣는다. 재궁 안에 남은 공간을 옷과 물품으로 채우는 보공(補空)은 본인의 옷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비롯해 평소 가까운 주변 인물의 옷을 넣어 편편하게 채운다. 뚜껑을 덮고 임(衽, 나비모양의 못)을 박는다. 박은 곳에는 옻칠한 가는 베를 붙이고 도끼 모양을 수놓은 관의[繡黼棺衣]를 덮고 병풍을 친다.
나는 끈이라고 표현했지만, '대'로 시신을 단단히 묶어 마치 꽃 모양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6월 초여름 날씨였지만, 에어컨 온도를 15~6도에 맞춰서 1시간가량 진행한 대렴 과정은 묶고 매듭짓기를 반복하는 지루한 과정의 연속인지라 제일 어린 스님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셨고, 진광 스님은 계속 염불을 해주셨으며, 다른 한 스님은 처음 보는 광경이셨는지 오랫동안 유심히 지켜보시다가 결국 '추위' 때문에 대를 묶는 과정이 3분의 2쯤 되던 시점에서 조용히 나가셨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얇은 가사만 입고 계셨는데 실내는 우리가 느끼기에도 너무 추웠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나에게 조용히 속삭이신다.
"너희 아버지, 저렇게 갑갑한 거 못 참는 사람인데..."
[사진 출처 : 별이 되어 상조]
사진을 찾아보니 대략 이런 과정의 연속이었고, 이후 두 명의 장례지도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생화가 가득한 관으로 옮겼다. 그때까지 염불을 해주시던 진광스님도 밖으로 나가시고, 이제 우리 가족만 남았다.
관 속에는 참 여러 가지를 넣었더랬다. 저승길에 필요한 노잣돈이라고 하는 봉투, 그리고 무언지 생각은 안 나지만 상조팀장이 설명하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넣었고, 어머니가 들고 계신 염주도 넣어드릴 거냐고 묻는다. 이는 평소 어머니가 기도하실 때 쓰시던 것이라서 대신 아버지가 생전 차던 손목 염주를 넣어드렸다.
마지막으로 마치 이불처럼 큰 다라니경을 아버지의 몸에 덮으며 마무리했다. 보통 다라니경을 한 장만 덮어준다고 하는데,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께 물어봤다. 아버지는 왜 3장이나 되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남매가 어릴 적 살았던 동네 근처 절에 참 열심히 다니셨다. 그리고, 두분은 젊은 시절, 본인이 죽을 때 덮을 다라니경을 한 장씩 받는 불교 의식 같은 것을 하셨다고 말씀했다. 어쩐지 두 장은 정말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한 장은 시다림을 해주신 스님이 가져오신 것이었고.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 것까지 아버지께 덮어드렸다. 차마 "그럼 엄마는?"이란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모든 의식이 끝나고, 상조 팀장이 말한다.
"이제 관 뚜껑을 덮을 시간입니다. 관 뚜껑 덮은 과정은 유족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가족분들은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아버님은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우리는 허탈한 마음으로 입관식장을 나왔다. 생전 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꽃관에서 잠드시는구나.
그런데, 죽어서 꽃 속에 파묻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허무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장례 3일 차, 발인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