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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Sep 24. 2023

6-2. 요셉_하느님이 더하시는 자

: 요셉의 꿈 해몽과 형들과의 재회


비아조 단토니오, <요셉의 이야기>, 1482년, 나무에 템페라, 68.6 x 149.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이탈리아의 화가 비아조 단토니오(Biagio d'Antonio, 1446~1516)는 요셉의 긴 생애를 두 개의 패널에 담았다. 후반부에 해당하는 위의 그림에는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가 간 후의 여러 에피소드가 펼쳐져 있다. 워낙 많은 인물과 사건이 묘사되었기 때문에 화가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써넣었다. (요셉은 GVSEPPO) 이야기는 왼쪽 후경에서 시작된다. 형들에게서 어린 요셉을 노예로 산 미디안 상인들이 그를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팔고 있다. 성문을 지나 있는 보랏빛 건물의 출입구에는 도망가는 요셉과 그를 붙잡은 포티파르의 아내가 보인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요셉은 누명을 쓰고 그 건물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림의 맨 오른쪽 전경에는 창문 너머 침실에서 꿈을 꾸는 파라오가 보인다. 그 건물의 열린 공간에서 요셉은 누구도 풀이하지 못한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고 있다. 결국 이집트의 재상으로 임명된 요셉이 중앙에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들어온다. 다시 뒤쪽 건물에서는 흉년 동안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과 요셉이 재회하는 모습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전면에 성밖에서 요셉은 이집트로 온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을 반갑게 맞아들인다.

 

요셉의 생애를 담은 한 쌍의 그림은 주문자의 침실 벽면을 장식했다고 한다. 핸드폰 화면으로는 그림을 읽기가 어렵고, 내용을 잘 모르면 물론 무척 혼란스러운 장면으로 보인다. 현대보다는 종교와 신앙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에게 요셉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 창세기 37-50장의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철부지 금쪽이에서 이방의 노예로, 결국 대왕국의 재상이 되기까지 요셉의 극적인 생애는 또한 한 편의 영화처럼 재미를 선사했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상황에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이 함께하심을 믿었던 요셉이 결국 높은 지위에 올라 나라와 가족을 살린 이야기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준다.  


요셉 전설의 대가, <감옥에서 꿈풀이하는 요셉>, 1500년경, 패널에 유채, 지름 156.2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포티파르의 아내를 희롱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서도 요셉은 하느님의 자애로 감옥 우두머리의 눈에 들어 죄수들을 관리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 한편 파라오의 측근인 헌작 시종과 제빵 시종이 잘못을 저질러 감옥에 들어왔는데, 어느 날 그들은 간밤에 꾼 꿈 때문에 근심하고 있었다. 헌작 시종은 파라오의 술잔에 포도송이를 짜 넣은 후 파라오에게 바치는 꿈을, 제빵 시종은 파라오에게 바칠 빵을 새들이 쪼아 먹은 꿈을 꾸었다. 요셉의 해몽대로 헌작 시종은 사흘 후에 파라오에게 술을 올리는 직위에 복직하고, 제빵 시종은 사흘 후에 교수형을 당했다. 요셉은 헌작 시종에게 결백한 자기를 기억해 달라 부탁했지만, 감옥을 나간 그는 요셉을 잊어버린다.



피터 폰 코르넬리우스, <요셉이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다>, 1815-7년, 프레스코, 236 x 290cm,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이년 후 특이한 꿈을 꾼 파라오는 모든 요술사와 현인들을 불러들였지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이집트인들은 신들이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꿈 해석 원리나 해몽 연구가 발달하였다. 게다가 신적인 존재인 파라오의 꿈은 나라의 운명과 연관되어 그 의미를 아는 것은 무척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때 헌작 시종장이 감옥에서의 요셉을 기억해 내고 파라오에게 추천해 요셉이 궁정에 호출된다. 어떤 꿈이든 해몽할 수 있느냐고 묻는 파라오에게 요셉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이 대답을 주실 거라고 말한다.


이 장면을 그린 독일 화가 피터 폰 코르넬리우스(Peter von Cornelius, 1783~1867)의 프레스코화로 가보자. 왕은 홀을 든 채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 있다. 파라오의 꿈은 마치 프로젝션을 쏜 것처럼 좌우에 떠 있는 원에 묘사되었다. 왼쪽에는 마르고 흉한 암소 일곱 마리가 살찐 암소 일곱 마리를 잡아먹는 꿈이, 오른쪽엔 야윈 이삭 일곱이 여물고 좋은 이삭 일곱을 삼키는 꿈이 보인다. 파라오의 꿈은 나일강을 배경으로 하는데, 규칙적으로 범람했던 나일강 주변은 고대 근동 지방 전체의 곡창지대였다. 게다가 암소는 생명력과 다산을, 곡식은 생존과 연관된다. 준수한 요셉은 마치 셈을 하듯 손가락을 세며, 앞으로 7년 동안 대풍이 들고 그 뒤에 7년 동안 기근이 든다는 하나의 계시로 꿈을 풀이했다. 주변에는 이전에 불려 왔던 요술사와 현인들이 이방 노예이자 죄인인 요셉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앞쪽에 앉아 있는 서기관은 요셉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기록하고 있다. 화가는 흥미롭게도 이집트가 아닌 유럽의 궁정과 인물로 이 장면을 묘사했다. 이어 요셉은 파라오에게 감독관들을 임명해 대풍 시기에 거둔 수확의 일부를 기근 동안을 위한 양식으로 비축하라고 제안한다. 파라오는 요셉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그를 재상으로 임명한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셨으니, 그대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또 있을 수 없소. 내 집을 그대 손 아래 두겠소. 내 모든 백성은 그대 명령을 따를 것이오. 나는 왕좌 하나로만 그대보다 높을 따름이오.” (창 41, 39-40)


로렌스 앨마 태디마, <요셉, 파라오의 곡창 감독관>, 1874년, 캔버스에 유채, 115.6 x 80cm, 다헤시 미술관, 뉴욕

서른 살에 이집트의 이인자가 된 요셉은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고, 흉년 동안 창고를 열어 곡식을 팔도록 지시했다. 또한 신전 사제의 딸과 결혼해 두 아들을 얻는다. 네덜란드의 태생의 로렌스 앨마 태디마(Lawrence Alma Tadema, 1836~1912)가 그린 요셉은 그야말로 이집트 재상의 자태를 보여준다. 우리에겐 위의 작품처럼 유럽의 백인으로 묘사된 성화가 익숙하지만, 예수를 포함해 성경의 인물들은 이처럼 어두운 피부를 가진 중근동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라오의 곡창 감독관 요셉은 이집트 의상과 여성의 긴 가발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다. 옆에 바닥에 앉아 있는 서기관은 곡물의 목록과 수량을 보고하는 듯하다. 뒷벽은 이집트 유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과 문양, 물품으로 장식되었다. 요셉 시기 이집트의 문화를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화가가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앨마 태디마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고대 문명을 이상적으로 정교하게 재현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98~1801)으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이 대거 발굴돼 들어오고 역사문화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의 초대 박물관장이 되는 도미니크 비방 드농 남작이 원정에 참여해 스케치한 삽화로 구성된 이집트 여행기(1802)는 유럽에서 이집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고증학적 관심이 커짐에 따라 유물과 자료를 토대로 성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생겨났다. 앨마 태디마 또한 테베의 무덤에서 발견된 독특한 가발 사진과 오브제, 고고학적 현장 사진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벽의 그림들도 영국 박물관에 네파문의 무덤에 있는 인물들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말 고고학의 발전은 성화의 표현에도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피터 폰 코넬리우스,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히다>, 1815-7년, 프레스코, 236 x 290cm,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기근이 들자 주변 지역에서도 곡식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몰려들었다. 가나안에 있던 야곱의 아들들도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로 갔는데, 형들은 이집트의 재상이 된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했다. 이 장면은 11개의 곡식단이 큰 곡식단에 절했던 어린 요셉이 꾸었던 꿈을 떠올리게 한다. 요셉은 짐짓 모르는 체하며 형들을 염탐꾼으로 몰아세우고, 결국 한 명을 인질로 잡아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막내 동생 벤야민을 데려오라고 시킨다. 형들은 과거의 과오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고향으로 가 아버지 야곱을 겨우 설득해 벤야민을 이집트에 데려갔다. 아우 벤야민을 만난 요셉은 그를 축복하며 몰래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요셉은 벤야민의 자루에 신점에 사용하는 귀한 은잔을 넣어 도둑 누명을 씌우고, 그를 종으로 삼겠다고 형들을 을러댔다. 유다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나서며 늙은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는 막내를 두고 갈 수는 없다고 요셉에게 간청한다. 이에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들을 용서한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 45, 4-5)


위에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을 그렸던 코넬리우스는 요셉과 형들과의 재회 장면도 남겼다. 형들에 대한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었던 요셉은 여러 번 형들을 시험에 빠트렸고, 결국 형제들의 우애를 확인하자 자신이 요셉임을 밝혔다. 위의 장면은 요셉이 동생 벤야민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다. 벤야민도 그의 목을 껴안고 운다. 주변 형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동생의 손등에 입 맞추거나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고 충격을 받거나 괴로워하는 이도 있다. 이후 요셉은 형들과도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붙잡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은 그와 이야기하였다.


코르넬리우스의 두 프레스코화는 프로이센의 총영사로 로마에 파견된 야콥 바르톨디의 저택(카사 바르톨디)의 응접실을 위한 장식이었다. 1815-17년에 코르넬리우스를 포함해 나자레파 화가들이 요셉의 생애를 주제로 그린 일련의 프레스코화는 19세기말에 분리되어 현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나자레파(Nazarene movement)는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독일 낭만파 그룹으로, 형제회를 조직하고 1810년 로마의 옛 수도원을 활동무대로 성경 속의 인물처럼 차려입고 수도사와 같이 생활했다.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 산치오와 알브레히트 뒤러를 모범으로 삼았고,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새로운 종교화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중세 장인들처럼 공동 작업을 했다. 과거를 동경하며 낭만화한 이들의 삶과 예술은 10년 만에 와해되었지만, 영국에서 비슷한 흐름인 라파엘 전파에 영향을 주었다.


(하단) 피터 폰 코르넬리우스, <요셉이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다>와 <재회>/ (상단 루네트), 필리프 파이트, <대풍 시기>, 요한 오버베크, <흉년 시기>, 1815-7년




요셉은 고향에 계신 아버지 야곱과 형들의 가족 모두 오게 해 이집트에서 풍요롭게 살게 한다. 야곱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는 아들들에게 유언과 축복을 남긴다. 야곱의 주검은 유언대로 가나안 땅 막펠라 동굴에 안장되었고, 요셉은 형들과 그 자식들을 부양하며 살다가 이집트에서 생을 마감한다.


요셉은 철부지에서 이방인 노예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지내다 이집트의 재상이 되기까지 창세기의 성조들 가운데 가장 극과 극의 삶을 오간 인물이다. 많은 부모들이 하느님이 함께하셔서 모든 일이 잘 이루어졌고 결국 성공했던 요셉처럼 자식이 자라기를 기도한다. 잘 들여다보면 요셉은 형제들의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였고, 억울하게 감옥에서 십여 년을 보내며 시련 속에서도 유혹에 넘어가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장해 나간 인물이다. 또한 하느님의 큰 계획을 믿고,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알았던 큰 마음의 소유자였다. 한편으론 이방 노예이자 잃어버린 동생 요셉을 통해 이집트는 물론 주변과 가족들이 기근 동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진 수난, 은전 20냥에 노예로 팔리고(예수는 유다에 의해 은전 30냥에 팔림) 이후 인류를 구제했던 것 때문에 신약의 예수를 예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마지막 성조 요셉은 창세기와 탈출기를 잇는 역할을 한다. 요셉을 통해 아버지 야곱과 형들의 가족 70명이 이집트로 오게 되고, 점차 히브리 민족이 번성하고 탄압받다가 결국 모세를 통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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