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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Jun 05. 2023

1-3. 아담과 하와_낙원을 잃어버린 인간

: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하느님의 부름에 아담과 하와가 알몸이 부끄러워 피해 숨자 하느님은 그들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알고 추궁한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유혹의 책임을 전가한다. 결국 하느님의 명으로 뱀은 저주를 받아 먼지를 먹으며 배로 기어 다니게 되고, 여자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남편을 갈망하는 종속적인 관계에 놓인다. 땅도 저주를 받아 남자는 평생 땀을 흘려 일해야 먹고살 수 있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창조주의 명령을 어긴 죄로 인해 인간 존재의 운명과 역할이 변화된 것이다. 하느님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쫓아 거친 땅을 일구게 한다.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불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한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 3, 19)



마사초,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1426-7년, 프레스코, 208 x 88cm, 브란카치 예배당,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피렌체


미술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추방 장면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한 예배당 구석에서 볼 수 있다. 14세기 부유한 실크 상인 브란카치가 가문의 묘로 봉헌한 예배당은 이후 베드로에 관한 일화로 장식되었다. 그런데 독특하게 상단 처음에는 마솔리노(Masolino da Panicale, 1383∼1447)의 아담과 하와의 유혹이, 마지막은 마사초(Masaccio, 1401∼1428)의 낙원 추방 장면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 문을 지키는 붉은 옷의 천사는 검을 들고 저 밖을 가리키며 아담과 하와를 내쫓는다. 문을 나서는 아담은 후회와 한탄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다. 반면 하와는 마치 고대의 비너스 조각상처럼 두 손으로 몸을 가리고 고개를 들어 통곡한다. 절망으로 무너져내리는 하와의 잿빛 얼굴은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다. 석조 아치문에서 뻗어 나온 날카로운 선은 낙원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을 강조한다. 성경에는 하느님이 가죽옷을 입혀 내쫓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알몸으로 추방되어 더욱 무력해 보인다. 한때 남녀의 중요 부위가 나뭇잎으로 가려지기도 했지만, 1980년대에 덧칠을 지워 원작대로 복원되었다.


중세에는 죄의 근원으로 여겨져 도식적으로 묘사되던 인간의 몸은 마사초를 통해 3차원의 육중한 몸과 다채로운 움직임을 갖게 되었고, 인간의 감정도 표정과 자세를 통해 풍부하게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최초로 그림자가 등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광원에 따라 공간에 위치한 인물을 현실에 가깝게 재현(representation)하려는 이 노력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발견한 선 원근법을 최초로 적용한 그림을 그렸다. 이런 면들에서 15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로 여겨졌는데, 안타깝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 죄의 대가로 낙원을 잃은 인간은 이제 거친 세상으로 나아가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겪으며 죽음을 앞둔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한탄스럽고 통곡할만한 일인가. 마사초의 아담과 하와에게 견딜만하다고, 아니 그 안에서 인간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유혹,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1510년, 프레스코, 280 x 570cm,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후에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청년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브란카치 예배당을 장식한 마사초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감탄하며 모사하곤 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무거운 근육질의 몸과 역동적인 자세, 적극적인 감정 표현에서 미켈란젤로가 마사초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장면에 이어, 위의 프레스코화는 나무를 중심으로 유혹과 추방의 이야기가 함께 묘사된 것이 특징적이다. 무화과나무로 보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는 여성의 얼굴과 몸이 달린 큰 뱀이 몸통을 휘감고 있다. 중세 교회가 여성을 원죄의 근원으로 보는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뱀은 종종 여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뒤돌아 앉은 하와는 과감하게 몸을 돌려 여자 뱀이 건네는 열매를 받는다. 아담은 두 팔을 뻗어 금단의 열매를 따고 있는데, 하와의 권유가 아닌 아담의 의지로 표현한 것도 독특하다. 게다가 미켈란젤로는 아담은 물론 하와도 육중한 근육질의 몸으로 묘사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창 3, 22)


하느님의 명을 어긴 최초의 인간에게 과연 어떤 일이 펼쳐질까.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하느님처럼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기적이고 주관적인 인간의 척도가 이끈 처참한 말로는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결국 맞은편에 붉은 옷의 날개 없는 천사는 칼을 뻗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낙원과 대조되는 척박한 대지에 선 이들은 마사초의 그림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런데 후회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아담과 하와의 얼굴이 낙원에서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죄에 물든 남녀의 얼굴은 주름 가득한 울상이고, 특히 온몸이 잿빛으로 변한 하와는 우람한 마녀처럼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마사초와 다르게 낙원을 잃은 인간의 고통과 후회보다는 죄악에 물든 인간의 추한 형상에 집중했다. 낙원 속 하느님 형상의 아름다운 인간과 대조시켜 죄의 결과를 가시화한 것이다.



벤자민 웨스트,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 1791년, 캔버스에 유채, 186.8 x 278.1cm, 워싱턴 국립미술관


낭만주의 시대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 1738∼1820)가 그린 추방 장면도 위의 작품들 못지않게 극적이다. 미국 출신의 화가는 영국으로 이주해 영향력 있는 역사화가로 성장했는데, 이 작품은 윈저궁에 왕실 예배당을 위해 구상된 대작 가운데 하나다. 왼쪽에 새하얀 옷과 날개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천사는 두 손을 들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친다. 불타오르는 듯 솟구쳐 오른 그의 머리는 하느님의 분노를 담고 있다. 그가 들어 올린 손을 통과하는 투명한 긴 검은 생명나무를 지키는 불 칼일 것이다. 왼편에 빛으로 가득한 에덴에서 쫓겨난 남녀는 어둠의 세상에서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느님이 지어준 멋진 털가죽 옷을 입고 있다. 아담은 한탄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하와를 붙잡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아담에게 의지한 하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그들 앞쪽에는 뱀이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나간다. 그 뒤로 사자는 놀란 말들을 추격하고, 하늘에는 독수리가 다른 새를 공격한다. 독특한 이 두 모티프는 낙원의 평화와 조화가 깨진 상태를 보여준다. 즉 원죄의 결과로 생겨난 육식동물, 맹수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 비극 같은 인물들의 연극적인 몸짓,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과 동물들의 움직임, 빛과 어둠의 대비로 인해, 인간 추방의 사건은 더욱 비장하고 마음을 흔드는 드라마로 다가온다.



제임스 앙소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1887년, 캔버스에 유채, 245 x 206cm, 앤트워프 왕립미술관  


벨기에 북해 연안의 휴양지 오스텐드 출신의 괴짜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1860∼1949)가 추방을 주제로 그린 작품은 한 편의 풍경화다. 미묘한 색채의 붓질 속에서 떠돌다 보면 하늘에 두 팔을 뻗은 형상과 지상에 두 인물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전통적인 플랑드르의 풍경화처럼 낮은 지평선에 광활한 하늘 중심에 있는 하느님은 한 손으로 저 먼 곳을 가리키며 인간을 내쫓는다. 주변에 눈부신 광휘를 발하고 있지만, 레이저를 발사하는 듯한 형상에는 분노가 스며있다. 아담과 하와가 도망가고 있는 전면에는 축축한 흙빛의 붓질이 아우성친다. 반면 저 멀리 초목이 우거진 곳은 평화로운 에덴동산을 암시할 것이다.


J.M.W. 터너, <태양 속에 서 있는 천사>, 1846년, 캔버스에 유채, 78.7 x 78.7cm, 테이트, 런던

앙소르는 독특하게 2m가 넘는 풍경 속에 추방 장면을 녹여냈다. 전통적인 성화처럼 추방의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아니었다. 신처럼 되고 싶었던 인간의 가혹한 운명은 드넓은 하늘과 낮게 펼쳐진 플랑드르의 자연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색과 빛의 감성으로 전달된다. 물론 당시 빛과 색채에 주목했던 인상주의의 영향도 보이지만,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작품은 ‘빛의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가 그린 성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검을 추켜올린 천사 뒤로 새어 나오는 낙원의 빛, 그 앞으로 휘몰아치는 색조의 변화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이야기, 하늘의 까마귀 등이 낙원을 잃은 인간의 거친 운명을 암시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빛을 자기 딸이라 말했던 앙소르도 그 풍부한 스펙트럼을 평생 연구했다. 앙소르는 아웃사이더였던 청년 시절에 종종 일상의 장면에 자신의 환상을 그려 넣었다. 위의 작품도 27살의 청년 앙소르가 집 꼭대기 작업실에 칩거하며 바라본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속에서 발견한 비전을 담아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아이가 없다. 빛이 나의 딸들이다.

둘로 나눌 수 없는 빛, 화가의 양식인 빛, 화가의 연인인 빛, 우리 감각의 여왕인 빛, 빛이여 빛나라.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환희와 지복으로 이르는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라” - 제임스 앙소르




구약의 시작은 어찌 보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온 천하만물의 창조주이며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위대한 피조물이라는 것, 하지만 최초의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현세 속에서의 삶과 운명이 형성되었고, 결국 우리 모두가 죄인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즉각적인 죽음으로 벌 받지 않았고 하느님이 거친 땅으로 나가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주셨다는 점이 희미한 희망으로 다가온다. 노동과 수고의 날들이 시작되었지만 신의 용서와 자비도 함께한다는 것이다. 인간 창조와 유혹, 추방으로 전개되는 그림들을 보다 보면, 시공간에 따라 인간에 대한 각기 다른 시선과 미감이 녹아있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신 중심의 중세 시대에 주목받지 못했던 인간의 육체, 이성과 감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르네상스 시대에는 가장 아름답고 지적이면서도 자신감 있는 인간의 형상이 등장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 존재의 미약함이 더 솔직하게, 다양한 수사로 표현되며 더 다양한 관람자의 공감을 얻어간다.


현세로 나와 우리와 같은 삶을 살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과연 어떤 삶이 펼쳐질까. 신은 낙원에서와 같이 인간과 함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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